인간이 일생동안 벌이는 싸움은 소유욕과 지배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싸 움이고, 그런 싸움의 이면에는 '반항정신' 이 도사리고 있다. 회사에서 승 진을 위해 벌이는 싸움은 '사장' 에 대한 반항정신이 기초가 되고, 이성 (異性)을 소유하기 위해 벌이는 사랑싸움은 상대방의 냉담함이나 건방짐에 대한 반항정신이 기초가 된다.
독창적 학문을 위해 벌이는 싸움은 기존 이론에 대한 반항정신이 기초가 되고, 정치적 민주화를 위해 벌이는 싸움은 집권자에 대한 반항정신이 기 초가 된다.
낭만적 휴머니스트들은 흔히 인간만이 갖고 있는 고귀한 특성 ---이를테면 '성선설(性善說)'이 주장하는 것 같은---을 찬양하고,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인류의 장래엔 반드시 평화가 올 것을 기대하며, 문화생활을 함으로써 야 수성이 없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아이러닉하게도 그'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여전히 전쟁은 벌 어지고 있고 '문화생활'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갖가지 무기가 개발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선성(善性)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갖가지 자유권 침해 가 이뤄지고 있다( '미풍양속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문학에 있 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개인의 독특한 성 취향, 이를테면 동성애같 은 것을 억압하는 짓 따위).
그러므로 낭만적 휴머니즘에 기초한 긍정적 인간인식은 성악설(性惡說) 에 바탕을 둔 부정적 인간인식보다 한결 더 위험하다. 차라리 인간은 무조 건 반항하고 싸워나갈 때 그래도 실존적 아이덴티티(Identity)를 확보할 수 있다는 현실적 인간관이 실질적인 효용가치가 있다.
내가 문학을 하면서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심리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마조히즘이 사디즘의 이면이라면(다시말해서 사디즘의 대상 이 '자기자신'인 것이 마조히즘이라면) 인간은 누구나 사디스트인 셈이고, 사디스틱한 공격욕이 인간 실존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디즘을 어떻게 '창조적 반항' 이나 '창조적 공격욕구'로 승화시키느냐에 있는 것이지, 사디즘 자체가 무조건나쁜 것은 아니다.
예수는 사디스트적인 면모를 종종 보여주었다. 그는 자기가 목마를 때 무화과나무에 무화과 열매가 안열렸다고 해서 무화과나무에 신경질적 저주 를 퍼부어 나무를 말라죽게 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에게는 죄가 없었다.
그때는 열매가 달릴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예수는 또한 먹고 살겠다 고 성전 안에서 장사를 하는 불쌍한 잡상인들을 채찍으로 내리쳐가며 몰아 내는 비겁한 잔인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조국 이스라엘에 대한 끊 임없는 저주를 퍼부으며 조국이 곧바로 멸망해 버리기를 기원했다.
그러니 예수를 교조로 떠받드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되어 곧바로 세 계의 종교(당시는 로마가 곧 세계였으므로)로 제도화될 수 있었던 것은 어 찌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로마 역시 사디즘을 기초로 번성한 무력국가였 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디스틱한 투쟁정신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그것이 안고 있는 위험성 때문이다. 사디즘은 자칫 '극단적인 저항' 으로 치달을 위험이 있다. 극단적인 저항이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는 식의 논 리를 말한다. 예수는 반항과 투쟁을 그토록이나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십 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는 스스로의 어이없는 희생을 긍정적으로 자기합리 화했다.
말하자면 사도마조히스틱(sado-masochistic)한 자기위안이 이루어진 것 이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도 결국에 가서는 스승의 죽음을 긍정 적 인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부산물로 '부활'과 '대속(代贖)'의 교 리가 이루어졌다.
내가 보기에 예수의 저항은 분명 '창조적 불복종'이요, '창조적 반항'이 었다. 그는 혈연과 지연까지 무시하는 과감한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그 이후 예수를 따르던 많은 신도들이 순교자가 되어 희생되거나 교리다툼의 와중에서 희생된 것을 모두다 창조적 반항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교주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이나 내세의 보상을 희구하는 마조히스틱한 자해의식(自害意識)에서 나온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독창적 학문을 위해 벌이는 싸움은 기존 이론에 대한 반항정신이 기초가 되고, 정치적 민주화를 위해 벌이는 싸움은 집권자에 대한 반항정신이 기 초가 된다.
낭만적 휴머니스트들은 흔히 인간만이 갖고 있는 고귀한 특성 ---이를테면 '성선설(性善說)'이 주장하는 것 같은---을 찬양하고,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인류의 장래엔 반드시 평화가 올 것을 기대하며, 문화생활을 함으로써 야 수성이 없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아이러닉하게도 그'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여전히 전쟁은 벌 어지고 있고 '문화생활'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갖가지 무기가 개발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선성(善性)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갖가지 자유권 침해 가 이뤄지고 있다( '미풍양속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문학에 있 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개인의 독특한 성 취향, 이를테면 동성애같 은 것을 억압하는 짓 따위).
그러므로 낭만적 휴머니즘에 기초한 긍정적 인간인식은 성악설(性惡說) 에 바탕을 둔 부정적 인간인식보다 한결 더 위험하다. 차라리 인간은 무조 건 반항하고 싸워나갈 때 그래도 실존적 아이덴티티(Identity)를 확보할 수 있다는 현실적 인간관이 실질적인 효용가치가 있다.
내가 문학을 하면서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심리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마조히즘이 사디즘의 이면이라면(다시말해서 사디즘의 대상 이 '자기자신'인 것이 마조히즘이라면) 인간은 누구나 사디스트인 셈이고, 사디스틱한 공격욕이 인간 실존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디즘을 어떻게 '창조적 반항' 이나 '창조적 공격욕구'로 승화시키느냐에 있는 것이지, 사디즘 자체가 무조건나쁜 것은 아니다.
예수는 사디스트적인 면모를 종종 보여주었다. 그는 자기가 목마를 때 무화과나무에 무화과 열매가 안열렸다고 해서 무화과나무에 신경질적 저주 를 퍼부어 나무를 말라죽게 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에게는 죄가 없었다.
그때는 열매가 달릴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예수는 또한 먹고 살겠다 고 성전 안에서 장사를 하는 불쌍한 잡상인들을 채찍으로 내리쳐가며 몰아 내는 비겁한 잔인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조국 이스라엘에 대한 끊 임없는 저주를 퍼부으며 조국이 곧바로 멸망해 버리기를 기원했다.
그러니 예수를 교조로 떠받드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되어 곧바로 세 계의 종교(당시는 로마가 곧 세계였으므로)로 제도화될 수 있었던 것은 어 찌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로마 역시 사디즘을 기초로 번성한 무력국가였 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디스틱한 투쟁정신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그것이 안고 있는 위험성 때문이다. 사디즘은 자칫 '극단적인 저항' 으로 치달을 위험이 있다. 극단적인 저항이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는 식의 논 리를 말한다. 예수는 반항과 투쟁을 그토록이나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십 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는 스스로의 어이없는 희생을 긍정적으로 자기합리 화했다.
말하자면 사도마조히스틱(sado-masochistic)한 자기위안이 이루어진 것 이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도 결국에 가서는 스승의 죽음을 긍정 적 인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부산물로 '부활'과 '대속(代贖)'의 교 리가 이루어졌다.
내가 보기에 예수의 저항은 분명 '창조적 불복종'이요, '창조적 반항'이 었다. 그는 혈연과 지연까지 무시하는 과감한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그 이후 예수를 따르던 많은 신도들이 순교자가 되어 희생되거나 교리다툼의 와중에서 희생된 것을 모두다 창조적 반항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교주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이나 내세의 보상을 희구하는 마조히스틱한 자해의식(自害意識)에서 나온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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