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이 지은 '사미인곡(思美人曲)'은
국문학사에서 매우 높이 평가 되고 있는 가사문학이다.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이 작품은 대표적인 충신연군지사(忠臣戀君之詞)로서,
별다른 이견(異見) 없이 명작으로 대우받아왔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나고
정철의 인간성과 인격에 의심이 가곤 한다.
최고권력자에 대한 지나친 아첨과 권력추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수사(修辭)가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창작심리의 배경에
작자의 위선성(僞善性)이 보일 때
그 작품을 과연 명작이라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럴 경우 정철의 작품은 좋은 보기가 된다
작가의 생애와 작품의 우수성 사이에 생겨나는 괴리 또한
문학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평가해야할지 헷갈리게 만드는 요소 중의 하나다.
정철의 가사는 여기에도 해당된다.
이를테면 그가 '관동별곡'을 지었던 강원도 관찰사 시절,
그는 백성들을 지나치게 엄혹한 방법으로 다스려 원성을 샀다.
시에서는 빼어난 기교와 낭만성으로 자연풍광을 그토록 운치있게 읊고 있건만,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그는 냉담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정치적 야심 때문에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선조 때의 가장 끔찍한 옥사(獄事)인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정철은 수사 담당관으로 임명되어
1 천여명이나되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유배지로 보냈다.
기축옥사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사건을 말하는데,
억울하게 죽어간 선비들이 더 많았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선조는 원래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인물은
모조리 제거하는 식으로 정치를 했는데, 그때 정철이 나서서 총대를 멨던 것이다.
이 충무공이 기축옥사 때 화를 당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무참하게 희생되었다.
물론 정철이 진짜 나쁜 사람이었는지 그저 단순한 원칙주의자였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어쨌든 빼어난 문학작품을 남겼다고 해서
작자의 생애가 무조건 미화되는 것만은 참을 수 없다.
고산 윤선도도 비슷한 의문을 품게한다.
그가 보길도로 유배갔을 때 지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의 낭만성과는 달리,
그는 보길도 주민들을 혹독하게 부려먹은 '심통사나운 양반'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시골 서민들에게
서울서 귀양온 양반은 또 하나의 골치아픈 상전일 뿐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유달리 권력지향형 성격을 타고나서 그런지,
아니면 조선조의 유교 윤리가
입신양명을 지상(至上)의 목표로 삼는 출세주의 이데올로기라서 그런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의 문인.학자들은
작품 창작이나 학문 연구보다 권력에 더 관심을 두는 경우가 많다.
대학 교수가 되더라도 평교수로는 만족 못하고
학장이나 교무처장 또는 총장 등 '보직'을 맡아야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은 줄로 안다.
보직을 맡으면 공부할 시간이 거의 없어 학문과는 담을 쌓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사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의 '학문적 실력'을 더 인정해 주고,
늙어서는 '학계의 원로'로 대접받게 된다.
또 그런 사람들은 '재임명 탈락'의 화를 당할 염려도 거의 없다.
재수가 좋으면 관계로 진출하여 장관 등의 고위관료,
또는 관변단체의 장(長)이 될 수가 있다.
문인도 마찬가지다.
그냥 혼자서 열심히 창작만 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문단의 '감투'쓰기를 원하는 이들이 많고,
그러려니 이른바 문단정치에 신경쓰게 되고 조직에 관심을 두게 된다.
그런 사람들 역시 잘만하면 정계에 진출하여 진짜 감투를 얻어 쓸 수도 있다.
과거 우리나라의 선비들 가운데는 진짜 선비가 참으로 드물었다.
다들 목을 빼고 임금이 불러주기만을 기다렸다.
정철이 지은 '사미인곡'은 선비들의 그런 심정을 나타낸 대표적 증거물이다.
선비는 곧 문인이요, 문인이 곧 정치관료였던 시절이니 만큼
권력에 초연한다는 것은 여간 둔하거나 고지식한 성격이 아니면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고 정치와 문화가 분립(分立)돼 있는 시대요,
분업주의(分業主義) 시대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 문화계는 독립적 지위 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문인이나 학자 언론인 등 문화계 인사들이 대개 어떤 형태로든
권력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독창적 개성이 생겨날 수 없고
'모난 돌'은 언제나 정을 맞을 수밖에 없다.
진짜로 깊이 생각해봐야할 문제다.
국문학사에서 매우 높이 평가 되고 있는 가사문학이다.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이 작품은 대표적인 충신연군지사(忠臣戀君之詞)로서,
별다른 이견(異見) 없이 명작으로 대우받아왔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나고
정철의 인간성과 인격에 의심이 가곤 한다.
최고권력자에 대한 지나친 아첨과 권력추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수사(修辭)가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창작심리의 배경에
작자의 위선성(僞善性)이 보일 때
그 작품을 과연 명작이라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럴 경우 정철의 작품은 좋은 보기가 된다
작가의 생애와 작품의 우수성 사이에 생겨나는 괴리 또한
문학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평가해야할지 헷갈리게 만드는 요소 중의 하나다.
정철의 가사는 여기에도 해당된다.
이를테면 그가 '관동별곡'을 지었던 강원도 관찰사 시절,
그는 백성들을 지나치게 엄혹한 방법으로 다스려 원성을 샀다.
시에서는 빼어난 기교와 낭만성으로 자연풍광을 그토록 운치있게 읊고 있건만,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그는 냉담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정치적 야심 때문에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선조 때의 가장 끔찍한 옥사(獄事)인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정철은 수사 담당관으로 임명되어
1 천여명이나되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유배지로 보냈다.
기축옥사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사건을 말하는데,
억울하게 죽어간 선비들이 더 많았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선조는 원래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인물은
모조리 제거하는 식으로 정치를 했는데, 그때 정철이 나서서 총대를 멨던 것이다.
이 충무공이 기축옥사 때 화를 당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무참하게 희생되었다.
물론 정철이 진짜 나쁜 사람이었는지 그저 단순한 원칙주의자였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어쨌든 빼어난 문학작품을 남겼다고 해서
작자의 생애가 무조건 미화되는 것만은 참을 수 없다.
고산 윤선도도 비슷한 의문을 품게한다.
그가 보길도로 유배갔을 때 지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의 낭만성과는 달리,
그는 보길도 주민들을 혹독하게 부려먹은 '심통사나운 양반'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시골 서민들에게
서울서 귀양온 양반은 또 하나의 골치아픈 상전일 뿐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유달리 권력지향형 성격을 타고나서 그런지,
아니면 조선조의 유교 윤리가
입신양명을 지상(至上)의 목표로 삼는 출세주의 이데올로기라서 그런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의 문인.학자들은
작품 창작이나 학문 연구보다 권력에 더 관심을 두는 경우가 많다.
대학 교수가 되더라도 평교수로는 만족 못하고
학장이나 교무처장 또는 총장 등 '보직'을 맡아야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은 줄로 안다.
보직을 맡으면 공부할 시간이 거의 없어 학문과는 담을 쌓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사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의 '학문적 실력'을 더 인정해 주고,
늙어서는 '학계의 원로'로 대접받게 된다.
또 그런 사람들은 '재임명 탈락'의 화를 당할 염려도 거의 없다.
재수가 좋으면 관계로 진출하여 장관 등의 고위관료,
또는 관변단체의 장(長)이 될 수가 있다.
문인도 마찬가지다.
그냥 혼자서 열심히 창작만 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문단의 '감투'쓰기를 원하는 이들이 많고,
그러려니 이른바 문단정치에 신경쓰게 되고 조직에 관심을 두게 된다.
그런 사람들 역시 잘만하면 정계에 진출하여 진짜 감투를 얻어 쓸 수도 있다.
과거 우리나라의 선비들 가운데는 진짜 선비가 참으로 드물었다.
다들 목을 빼고 임금이 불러주기만을 기다렸다.
정철이 지은 '사미인곡'은 선비들의 그런 심정을 나타낸 대표적 증거물이다.
선비는 곧 문인이요, 문인이 곧 정치관료였던 시절이니 만큼
권력에 초연한다는 것은 여간 둔하거나 고지식한 성격이 아니면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고 정치와 문화가 분립(分立)돼 있는 시대요,
분업주의(分業主義) 시대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 문화계는 독립적 지위 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문인이나 학자 언론인 등 문화계 인사들이 대개 어떤 형태로든
권력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독창적 개성이 생겨날 수 없고
'모난 돌'은 언제나 정을 맞을 수밖에 없다.
진짜로 깊이 생각해봐야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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