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상품화는 인간 해방을 돕는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상품화'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문화상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도 많아 이중적 양면성을 보이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는 인류가 교환경제 체제를 굳힌 이래 모든 것을 '상품화'시켜 문화발전을 가능케 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상기해 봐야 한다. 그러므로 '상품화'에 대해서 무조건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
학자는 '지식'을 상품화하여 생계를 유지함은 물론 학문의 진보에 기여한다. 또한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배우는 '외모'를 상품화하여 영화나 연극의 완성도를 높인다. 그런데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지식의 상품화'엔 상당히 관대한 시선을 보내면서도, '몸의 상품화'엔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런 현상이 조선조식 양반의식에 바탕한 정신우월주의적 가치관과 엄숙주의적 도덕관, 그리고 육체적 쾌락에 대한 소망과 경멸감 사이에서 야기되는 양가감정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모든 '지식의 상품화'가 관대하게 취급되는 것도 아니다.
아카데미즘적 경건주의에 함몰돼 있는 지식인들은 지식의 상품화에 대해서도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일이 많다. 대중적 학술서나 문화 비평적 에세이집 같은 것이 혹 많이 팔려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끼였을 경우, 그 책의 저자는 '지식을 상품화한 자'로 낙인찍혀 매도당하기 쉽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볼 때 '상품화'에 대한 비난에는, 그것이 정신의 상품화든 몸의 상품화든 '복합적인 질투의 심리'가 어느 정도 개입돼 있다는 것을 짐작해 알 수 있다.
나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두고 얘기하자면, 1989년에 출간한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반 이상이 문학비평으로 채워져 있는 일종의 문화비평적 에세이집이었다. 그런데 그 책이 꽤 많이 팔려나가자 상당수의 지식인들은 '성'을 상품화했다는 이유로 나를 비난했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내 책을 읽어보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 말하자면 제목만 보고 무조건 비난의 화살을 퍼부어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지식의 상품화, 그 가운데 특히 '성에 대한 지식의 상품화'에 대하여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이 상당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온몸으로 겪은 스트레스를 통해 체감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중국의 대성이라 불리는 공자는 자신의 정치학 지식을 상품화하여 제후들에게 팔기위해 전국을 주유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제자백가들이 자신의 학식을 상품화하여 정치일선에 뛰어들거나 제자들을 교육하여 생업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상품화'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선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럴 경우 결국 논란의 초점이 되는 것은 '몸의 상품화' 문제가 될 것인데, 정신 역시 '몸' 안에 포함돼 있는 기능의 일종이라고 볼 때 '몸의 상품화'가 무조건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몸의 상품화'에 대한 문제에 대해 심도있고 성의있게 생각해 보려면 우선 '몸'의 실체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대체로 우리 나라 지식인들은 '몸'과 '정신'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생각이다. 데카르트는 정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두뇌')이 육체를 지배한다고 생각하여 삼신이원론을 수립했고, 이는 서구 합리주의 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동양 전래의 육체관을 살펴보면 데카르트의 생각은 매우 어색한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두뇌 역시 몸의 일부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전통한의학 사상에 비춰보면 더욱 그렇다.
한의학 이론에서는 정신의 특별한 주관자로서의 '두뇌'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체를 주관하는 오장육부 가운데서 뇌가 빠져있는 것이다. 한의학 이론에 의하면 뇌의 정신활동을 지배하는 것은 오히려 뇌를 뺀 육체의 오장육부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심장이 생각을 지배한다고 보는데, 다른 장기인 폐장, 비장, 간장, 신장 역시 심장을 도와 정신을 지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 나라의 전래 관용어인 "허파에 바람이 들었다","간이 크다","쓸개가 빠졌다","심장이 내려앉았다"등은 그런 관점에서 만들어진 말들이다. 말하자면 정신이 과대망상에 빠지는 것은 뇌의 대사작용 이상 때문이 아니라 허파에 바람이 들었기 때문이요, 용감한 심성이 되는 것은 간이 크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이런 관점은 '정신'을 오히려 '몸'의 하위개념으로 보는 인식방법인데, 서구의 정신우월주의에 비해 훨씬 더 총체적인 인간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몸의 쾌락, 특히 성의 쾌락을 억압한 역사가 없었다.('중국 성풍속사'를 쓴 네덜란드의 풍속학자 R.H. 반 홀릭은 , 이점에 대해 특히 놀라워하고 있다.) 서구의 역사가 기독교 교리에 의한 몸의 억압, 또는 육체적 쾌락의 억압의 역사로 점철됐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 (17세기 말까지 계속된 집단적 모럴 테러리즘인 '마녀사냥'의 대상은 대부분 '섹시한 여자들'이었다.) 동양의 육체관이 서양의 육체관보다 훨씬 더 인성을 중시하는 휴머니즘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난다.
중국에서는 '성의 즐거움'이 건강증진법의 차원에서 검토되고 논의되었을 뿐, 윤리적 선,악의 차원에서 논의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소녀경'같은 성경은 중요한 대중의학서로 인정되었고, 이것은 인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인도 역시 '카마수트라'등의 성경을 지어 귀중한 저서로 취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의 상품화'와 '몸의 상품화'는 둘 다 같은 개념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몸 안에 정신이 있고 정신 안에 몸이 있기 때문이다. 정신의 쾌락과 몸의 쾌락은 등가성을 갖는 것이고, 어느 쪽이 좀더 고상하고 어느 쪽이 좀더 저열한 것은 아니다.
심각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철학책을 사가지고 읽으면서 맛보는 쾌감이나, 여성(또는 남성)의 선정적인 몸을 찍은 사진집을 사가지고 보면서 맛보는 쾌감은 똑같은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몸의 상품화'에 대해서만 유독 비난의 칼날을 들이대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지식인의 도덕적 보신주의 성향에서 나온 이중적 처신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많다.
몸의 상품화든 정신의 상품화든, '상품화' 문제에 대해 상당수의 지식인들은 대단히 이중적인 반응을 보인다. 앞서도 말했듯이 철학책을 출간하는 행위나 에로티시즘 소설을 출간하는 행위나, 무언가를 '상품화'하여 먹고 살아간다는 점에 있어서는 결국 마찬가지 행위이다. 고도의 로빈슨 크루소가 된다면 모르겠으되, '상품화'를 피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사회에서는 어떤 '상품화 행위'에 대해서는 그것을 교묘하게 호도하여 고귀한 행위로 격상시키려 한다거나, 어떤 '상품화 행위'에 대해서는 그것을 교묘하게 폄하하여 천박한 행위로 몰아붙이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를테면 학교 선생이 지식을 상품화하여 먹고 사는 것은 상품화가 아니라 '교육'이요, 육체 근로자가 몸을 상품화하여 먹고 사는 것은 상품화가 아니라 '고귀한 노동'이라는 식이다. 또 이와 반대되는 현상도 일어나는데, 미스 코리아 대회 같은 데서 아름다움을 경쟁하는 행위를 '몸의 저열한 상품화'로 보는 관점 같은 것이 그것이다. 에로티시즘 문학의 경우도 같다.
물론 '나쁜 상품화'와 '정당한 상품화'의 구별은 있을 수 있다. 여성(또는 남성)을 인신매매하여 매춘행위에 종사케 하는 것은 몸의 '나쁜 상품화'이다. 그리고 자신의 체력으로 노동을 하여 돈을 버는 것은 몸의 '정당한 상품화'이다. 또한 사이비 교리로 광신도를 모아 종교를 팔아먹는 행위는 정신의 '나쁜 상품화'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몸의 상품화'에 있어서만은 나쁜 상품화와 정당한 상품화의 구별이 애매한 것이 많다.(모든 시비와 논란은 여기서 나온다.)
이를테면 어떤 여성(또는 남성)이 스스로의 자유의사와 당당한 직업정신에 따라 매소행위를 하면서 (다시 말해서 접대부로 일하면서) 돈을 번다던가, 어떤 작가가 자시의 신념에 따라 성을 소재로하여(다시 말해서 성을 문학 상품화하여) 책을 써서 수입을 얻는다거나하는 행위 같은 것이 그렇다. 이런 행위에 대해서는 그것을 '나쁜 상품화'라고 봐야 할지 '정당한 상품화'라고 봐야 할지 판단이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먼저 후자의 경우를 놓고서 생각해 보자. 어떤 작가가 종교사상이나 진보적 이데올로기를 소재로하여 책을 써서 파는 행위를 두고서, 사람들은 그것을 '종교의 상품화'나 '이데올로기의 상품화'라는 꼬리표를 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앞뒤가 안 맞는 가치판단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런 소설 가운데 혹 나중에 가서 '명작'(이를테면 핸리 밀러의 '북회귀선' 같은 것)으로 판정된 작품에 대해서는 '성을 상품화한 소설'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발적 매소나 매춘의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판단이 어려워진다. 지금도 일부 선진국에서는 매춘업에 종사하는 남녀들이 자기네가 하는 일이 떳떳한 '직업'으로 인정해 주기를 요구하며 사회운동을 벌이고 있다. 아주 옛날에 신전에 소속된 매춘부들을 '신성한 이타심을 실천하려는 성스러운 직업인'으로 인정한 적도 있었다. 또 기독교의 성자로 불리는 어거스틴조차 매춘의 필요성을 인정하여 그것을 '하수도 역할'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사회의 경제상태가 호전되면 '돈 때문에 할 수 없이 몸을 파는 여성들'의 숫자는 확실히 줄어든다. 그러나 그 대신 '당당한 직업정신을 가지고 몸을 파는 여성들'의 숫자가 늘어나 매매춘은 여전히 존재하게 된다. 또한 여권이 신장되고 남녀평등 의식이 확산되면 몸을 파는 여성들뿐만 아니라 몸을 파는 남성들 역시 늘어나 매춘의 문제가 단지 여성문제만으로 국한되지 않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몸의 상품화'를 무조건 매도할 수만은 없게 되는 상황에 이른다. 왜냐하면 사회제도에 의한 '성의 억압'이 엄존하는 상황에서는 어떤 수단으로든 '성의 억압'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시도가 생겨나게 마련이고, 그런 시도 중의 하나가 매매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황금만능주의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모든 사태의 원인으로 지적될 수도 있다. 당당하게 몸을 판다 하더라도 그런 행위의 목적은 결국 '돈'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도 매매춘을 근절시키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매매춘의 문제는 '돈의 문제' 때문에 생기는 이 아니라 '욕망(즉 성욕)의 문제'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성을 억압하는 여러 사회문화적 요인들이 '몸의 상품화'를 초래하게 한다는 얘기다.
'몸의 간접적 상품화'라고 할 수 있는 에로티시즘 예술이나 포르노의 경우를 두고 생각해 보더라도, 그런 것들의 배후에는 대중들로 하여금 '성욕의 대리배설(또는 대리만족)'이라도 간절히 바라게끔 만드는 범사회적 성 억압 현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몸의 상품화' 현상에는 성문제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물론 '아름다운 몸'을 보면 음란한(?) 성욕이든 고상한 성욕이든 자연 성욕이 일어날 것이므로, 아름다움의 문제 역시 성문제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럴 경우 '아름다움'과 '성'은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름다움의 근본은 역시 '선정성'에 있다고 본다. 성스러운 아름다움의 극치라는 불교의 관세음보살상 같은 것이 좋은 예다. 관세음보살상은 대개 선정적이고 관능적인 몸매와 야한 장신구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찌 됐든 요즘 들어 '몸의 상품화' 문제의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은 역시 '아름다운 몸'이 아니라 '선정적인(즉 섹시한) 몸'이다.
고전적인 우아미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별로 비난의 화살을 보내지 않는다. 그러나 육감적인 관능미에 대해서는 대개 비난의 화살을 보내는 것이다.(아니 보내는 '척'하는지도 모른다.)
따져서 생각해보면, 육감적인 관능미가 고전적인 우아미를 압도하게 된 것은 사실 어느 정도의 '민주화'와 '성해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성이 단순한 '생식'의 차원을 넘어 '쾌락'의 차원으로 확대되고, '쾌락을 위한 성'에 대해 죄의식이 자유민주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쾌락을 위한 성이 소수 특권귀족의 전유물이었고, '고전적 우아미'가 미의 기준처럼 된 것은 귀족적 특권의식의 산물이었다. 우리 나라의 조선시대나 서구의 봉건시대 때는 치장이나 옷차림에까지도 신분계급에 따른 규제가 뒤따랐다. 자유민주주의의 발달은 성적 쾌락의 문제를 대중들의 '행복추구권'과 복지 및 인권의 차원에서 생각하도록 만들었고, 귀족적 아름다움에 맞서는 '천박한 아름다움'의 수주네 머물러 있던 '육감적 관능미'를 '보편적 아름다움'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또한 대중경제의 발달은 성의 문제 또는 성적 아름다움의 문제를 '밥'의 문제보다 더욱 중요한 관심사로 부상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관능적 몸매나 관능적인 화상, 치장, 옷차림 등에 대해 사람들이 큰 관심을 쏟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 보니 '관능적 아름다움'의 상품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독일의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는 그의 저서 '사랑과 사치와 자본주의'에서, 왕족과 귀족에게 국한되었던 성애적 사랑과 관능적 사치가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대중적 자본주의 및 시민혁명이 촉진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관능미의 상품화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은 이중적 시각을 갖고 있다. 유명한 화가가 그런 관능적 나체화(이를테면 앙그르의 <하렘의 목욕탕> 같은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예술'이라 부르고, 성인잡지에 실린 관능적 누드 사진 같은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외설'이라고 매도하는 것이 좋은 예다. 라파엘이 그린 성모상에서는 풍만한 가슴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젖가슴을 크게 만드는 성형수슬을 받은 여성은 자신의 몸을 '성적으로' 상품화했다는 이유로 비난받기 쉽다.
보수적 여성단체에서는 '미스코리아 대회'같은 것을 여는 것에 대해 한사코 반대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다. 하나는 '여성의 몸'을 상품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하나는 같은 여성의 몸이라도 '육감적 관능미'에만 중점을 두어 미를 평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지적사항에 관해서는, 남성 역시 자신의 몸매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지나친 비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스 코리아' 대회에 비해 '미스터 코리아'대회가 사람들의 관심을 못 끄는 이유는, 남성의 육체미가 여성의 육체미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사회제도는 남성들을 전쟁이나 노역에 동원하기 위해 그들이 아름다움을 가꿀 기회를 박탈해 버렸다. 그래서 요즘에는 여성같은 화사한 몸매를 갖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여장남성들의 수효가 급증하는 추세헤 있는데, 이는 '남성해방운동'의 신호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상당수의 남성들은 자신이 반드시 용감해야 하고, 투박한 육체를 가져야 하고, 힘이 세야 한다는 사실에 반발하고 있다. 물론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적은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가 여성들로 하여금 오직 '몸의 아름다움' 하나로만 신분상승의 길을 모색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름다움 자체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본다. 사회적 출세와는 상관없이 남성과 여성은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인대회든 미남대회든, 그것은 몸의 상품화가 아니라 단순한 경연대회일 뿐이다. 말하자면 씨름 등의 체육 경기나 노래부르기 대회 같은 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것이다.(최근에는 올림픽 대회에서 조차 리듬체조나 수중발레, 빙상 등에서 몸의 아름다움이 체력 못지않게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 지적사항인 '육감적 관능미' 문제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째서 나쁘냐고 거듭 반문하고 싶다. 사실 '지성미'라든가 '정신의 아름다움'같은 것은 그 실체가 지극히 애매모호하다. 남자든 여자든 이성을 볼 때 우선 상대방을 성적 대상으로 파악하게 마련이다. 이는 인간 역시 동물의 일종인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본다.
많은 인류학자들은 (대표적인 학자로 '인간보기'를 쓴 데즈먼드 모리스를 꼽을 수 있다.) 인간의 몸매가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형성되게 된 것이 '성적 유인'을 위한 진화과정의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간과 비슷한 동물인 유인원에겐 없는 풍만한 젖가슴이나 매끄러운 피부등은 모두 성적 애무를 위해 진화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직립을 하여 농경과 목축을 통해 잉여 에너지를 비축하게 된 뒤에 나타나게 된 현상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다른 동물들처럼 동면을 하지 않고 일정한 발정기 없이 1년 내내 섹스를 할 수 있게 된 뒤부터, 자신의 몸매를 '성적 심벌'로 진화시켜 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인간의 특성상 '육감적 관능미'가 솔직하게 상찬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이요 진보된 현상(질실에 대한 진일보한 접근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에서)이라 하겠다.
현대의 소비대중문화는 물신주의로부터 출발한다. '물신주의'란 말은 '페티시즘'을 번역한 것인데, 페티시란 말은 원래 어떤 마술적 의미를 가진 숭배물이나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를테면 돌이나 금속으로 만든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 같은 것이 페티시즘이다. 다른 말로 주물숭배라고도 할 수 있겠다.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자본론'에서 페티시즘에 대해 언급하고,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페티시는 '돈'이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비난을 퍼부은 바 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몸의 상품화'는 '몸의 물신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정신적 요소가 빠진 몸 자체만을 신격화시켜 그것을 숭배하는 행위가 '화폐숭배'와 연결되는 것이 바로 '몸의 상품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몸의 숭배'의 이면에는 그동안 인류를 괴롭혀왔던 '정신적 가치'또는 '형이상학적 가치'에 대한 반발심리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형이상학은 종교 또는 이성 우월주의 등으로 환치되어 인간의 본성을 오랫동안 억눌러왔다.
중세기적 가치관을 한마디로 뭉뚱그려 형이상학적 가치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런 가치관에 대한 반발로 르네상스가 이루어졌고, 르네상스의 연장선상에서 반형이상학적 유물론이 싹텄다. 반형이상학적 유물론은 정신주의에 반대하는 '육체주의'를 탄생시켰고, 육체주의는 곧바로 육체적 쾌락 중심의 가치관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육체적 쾌락은 곧 '물질적 행복'이나 '안락'과 동의어이기도 하므로, 거기서 부르주아 중심의 근대 산업혁명이 이루어지게 됐던 것이다.
부르주아적 가치관은 '돈'을 숭배하는 것이긴 하되 적어도 중세기적 종교독재나 형이상학적 독재보다는 한결 나은 행복을 보장해 주었다. 물론 초기에는 노동자들의 과도한 희생이 뒤따라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내세운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한 이후, 노동자들 역시 돈이나 물질적 행복에 경도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게 되었다. 구 소련이나 동구권 공산국가들의 붕괴는, 노동자들의 물질숭배나 돈 숭배를 지나치게 간과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몸 숭배'는 '정신숭배'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고, '몸'이 상품화 된다는 것은 화폐경제 체제하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중세기말에는 교황청에서 '면죄부'를 만들어 돈을 받고 팔기까지 했는데, 이는 기독교 정신을 팔아먹은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몸을 상품화 시키는 것이 정신을 상품화시키는 것보다는 한결 본성에 솔직한 행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육체적 노동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요구하는 '노동운동'은, '몸의 상품화'를 긍정적 측면에서 보다 적극화 시키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페티시즘을 물신숭배적 측면에서만 보지 않고 성적 측면에서 관찰할 수 있을 때, '몸의 상품화'가 지닌 긍정적 측면을 더욱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페티시즘은 곧 '미의 민주주의'로 이어지고, 미의 민주주의는 개성미의 확장에 따른 건강한 나르시시즘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몸의 상품화'와 '페티시즘', 그리고 '소비대중문화'가 연결될 때, 거기서 최소한의 '미적 자족감'이 생겨 인간의 마음을 보다 풍족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얘기다.
성적 의미의 페티시즘은 우리말 번역이 꽤 까다롭다. 절편음란증이라고 번역하는 학자도 있으나 그렇게 되면 페티시즘이 너무 변태성욕 같은 인상을 주기 쉽다. 그래서 나는 그 말보다는 차라리 '고착적 탐미애' 정도로 번역해서 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성적 의미의 페티시즘은 이성 신체의 특정한 부분이나 신체에 부착된 물건(장신구나 구두 등)을 '페티시' 즉 관능적 숭배물로 삼아, 그것을 보거나 접촉하면서 삽입성교 이상의 성적 극치감을 느끼는 심리를 가리킨다. 말하자면 '관능미에 대한 적극적인 몰입'이라고 할 수 있다.
'매력적이다'라는 말을 영어로는 'charming'이라고 하는데, 'charm'이라는 단어는 '마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charming'이라는 말의 뜻은 마술에 홀린다는 뜻이다.(매력의 '매'자에도 귀신 귀자가 들어있다.) 따라서 인간은 모두 어떤 이성이 지니고 있는 마술적 주물 즉 '페티시'에 홀려, 그것에 매력을 느끼고 사랑에 빠져든다고 할 수 있다.
페티시는 '성적 상징 역할을 하는 일부분'이라는 의미에서 심벌리즘과도 관계가 깊다. 어떤 특정한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거나 암시하는 것이 상징인데,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페티시는 '관능적 상상력의 확산을 위한 상징적 자극물'이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다 페티시스트로서의 성 취향을 갖고 있다. 누구나 어떤 이성을 처음 볼 때 다리나 머리카락이나 손 등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곳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머릿결이 고운 남자만 보면 미쳐"라고 말하는 여자도 있고, "나는 다리가 미끈하게 뻗은 여자만 보면 미쳐"라고 말하는 남자도 있다.
남성이 갖는 페티시즘의 일반적인 대상은 여자의 피부색, 머리색, 손 및 손톱, 발, 머리카락, 젖가슴, 다리, 엉덩이, 배꼽등을 비롯하여 속옷, 장갑, 털코트, 그물 스타킹, 꽉 끼는 가죽옷, 노출이 심한 의상, 긴 부츠, 하이힐, 독특한 화장, 코걸이, 배꼽걸이, 젖꼭지걸이, 음순걸이류의 특이한 장신구 등이다.
여성도 남성에게서 페티시즘적 흥분을 느낀다. 그럴 경우 그 대상이 되는 것은 머리카락, 피부색, 콧수염, 어깨, 다리, 엉덩이, 손, 가슴털, 관능적 의상, 목걸이나 귀걸이 류의 장신구 등 여성의 페티시와 대동소이하다.
페티시즘을 미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그것은 변태성욕이라기보다 현대에 이르러 자유화 추세에 따라 달라지기 시작한 '미적 관점의 변화'를 반영하는 심리라고 할 수 있다. 즉, 미의 기준이 획일적 균형미에서 다양한 개성미로, 그리고 고전적이고 귀족적인 우아미에서 관능적이고 대중적인 퇴폐미로 바뀌어가는 경향을 지배하고 있는 심리가 바로 페티시즘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미적 기준은 균제와 조화로서,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우아한 미모를 이상으로 하였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도래와 함께 미의 이상은 바뀌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의 대두와 더불어 "관능적인 것은 어떤 것이든 아름답다"는 쪽으로 의식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여성의 경우, 예전에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다분히 획일적이었다. 우리나라 조선조 때는 앵두같은 입술, 초생달 같은 눈썹, 세류같이 가는 허리, 처마처럼 흐른 어깨라야 되었다. 유방이 커서도 안되고, 키가 커서도 안 됐다. 눈도 발도 다 작아야만 했다.
특히 기준이 제일 엄격했던 것은 얼굴의 모양새였다. 참외쪽 같기도 하고 계란 같기도 한 갸름한 얼굴형이어야만 미인으로 쳤다. 무엇보다 이마의 모양이 아주 중요했다. 요즘처럼 이마를 푹 가리는 헤어스타일은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시대였으므로, 단아하게 머리를 위로 빗어올려 땋든, 쪽을 찌든, 다리(가발)을 얹든 간에 좌우지간 이마가 반듯하면서 넓지도 좁지도 않아야 했다.
이런 형의 미녀가 되려면 미모를 타고난, 그것도 인습적으로 규정된 미모를 타고난 여인이라야만 가능하다. 시대에 따라 미의 기준은 조금씩 달라지게 되지만, 아무튼 주로 '전체적인 조화'와 '타고난 미모'가 미인의 기준이 되었던 것은 동서양이 다 같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대 이후 현대에 들어와서는, 아름다움이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새로운 신념이 사람들 사이에 싹텄다. 특히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고 선언하여 예줄적 인공미를 강조함으로써, 자연미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자기의 단점을 커버하고 장점을 살리는 식의 미용법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마가 너무 넓거나 좁으면 머리카락으로 푹 가리면 되고, 광대뼈가 나무 나왔으면 머리를 좌우로 늘어뜨려 뺨을 가리면 된다는 식이다. 거꾸로 이마가 예쁘면 머리를 모두 뒤로 빗어넘겨 이마를 드러내면 된다. 또한 화장술과 성형수술의 발달은 외모상의 단점을 보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와 동시에 '몸'에 관련된 산업, 이를테면 화장품 제조업이나 패션산업, 장신구나 가발 제조업 같은 것들이 대중적 수요의 확산에 의해 크게 발전하여 경제적 풍요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페티시즘은 누구나 관능적인 사람이 될 수 있게끔 하는 '개성적 매력의 창출'에 큰 역할을 한다. 성형수슬을 통해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것도 미적 평등에 기여한 커다란 발전이긴 하지만, 아직도 '전체적인 조화미'를 겨냥한다는 점에서 충분한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부분적인 강렬함'으로 '전체적인 조화미'를 압도할 수 있을 때, 누구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다고 본다.
그렇게 되면 개개인은 누구나 자기의 기호와 관능적 상상력을 살려 각자의 '페티시'를 당당하게 개발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여자의 경우라면 '화장을 전혀 안하고 장신구도 안 한 여자가 진정 아름다운 여자'라는 자연미의 환상으로부터 해방되어, 각자 스스로의 페티시를 통해 나르시시즘을 즐기면서, 아울러 자기가 가꾼 페티시에 집착하는 이성과의 사랑도 가능하지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특별히 긴 머리카락이나 특별히 긴 손톱을 페티시로 가꿀 경우, 그 페티시가 풍기는 관능적 매력은 전체적인 조화, 균형미를 훨씬 능가할 수 있다. 그리고 긴 머리카락이나 긴 손톱에 특별히 지속적인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럴 때 '패티시의 상품화'는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 가발이나 모조손톱 같은 것은 '몸의 상품화'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라, 미적 평등의식에 기반을 두는 당당한 나르시시즘에 이바지하는 심리적 보조물이다.
'전체적으로 완벽한 미'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 쳐도 그것은 관념적인 것이어서 성적인 것과는 무관하다. 성적인 아름다움만이 진정한 아름다움이요 실용적 아름다움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있는 '외모 콤플렉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몇몇 기업가들이 유행심리를 조작하여 만들어낸 획일적인 헤어스타일이나 획일적인 의상등은 이제 차츰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는 다리가 예쁜 여성은 짧은 치마를, 다리가 미운 여성은 긴 치마를 입을 권리가 있다. 화장도 전체적인 화장에서 부분 화장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또 남성들의 복장이나 헤어스타일 역시 점점 더 개성화되고 관능적으로 되어간다.
그러나 이러한 '개성미의 확장'이 단지 스스로의 단점을 커버하는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보다 대담하게 스스로의 패티시를 창조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러려면 각자의 개성적 패티시를 인정해줄 수 있는 다원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회풍토의 확립이 시급하다. 각자의 개성적 패티시를 적극적 성애를 위한 상징적 자극물로 수용하는 자세가 사회적으로 정착될 수 있다면 인간은 관념적, 도덕적으로 강제된 획일적 미학으로부터 해방되어 누구나 창조적 관능미를 가꿔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이 그리워하는 원초적인 마음의 고향은 물론 아담과 이브가 벌거벗고 뛰어 놀던 에덴 동산이다. 그러나 나체주의로 돌아간다고 해서 우리가 다시금 행복을 보장받을 수는 없다.
우리는 차라리 애초에 수치심의 표상으로 생겼던 '무화과 잎사귀'를 자연미에 대항하는 '개성적 패티시'로서의 '관능적 창조물', 즉 '관능적 상품'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인간은 신의 피조물로서의 '숙명'과 자연법칙에 종속된 '생식적 섹스'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리고 인공적 아름다움과 창조적 성이 일체화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관능적 상품'으로서의 패티시는 색색가지 가발이나 모조손톱뿐만 아니라, 개성적인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팬티, 속옷, 인조 속눈썹, 장신구, 색조 화장품, 하이힐, 선정적인 의상등 수없이 많다.
지금까지 변태성욕의 하나로만 간주됐던 패티시즘을 현대인의 모든 생활미학에 적용하여 당당하게 상품화시킬 수 있을 때, 개개인의 미의식과 성관은 창조적 발전의 전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관념적 자유가 아닌 실제적 자유 즉 '몸의 자유'를 쟁취할 수 있게 된다. 실제적 자유의 쟁취는 '관능적 쾌락추구의 정당성'이 보편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풍토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의 소비대중문화는 '몸의 아름다움'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결국 '패티시의 상품화'로 나타나 일반 대중의 미적 평등에 기여한다. 성의 상품화 역시 성 자체보다는 '관능미'의 상품화로 발전하여, 성이 소유와 피소유의 형태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미적 완상'의 형태로 구현되어 가는 경향이 있다.
생식적 성보다는 비생식적 성이 보편화되고, 이성간의 합일에 의한 성만이 아니라 혼자서 즐기는 성, 즉 관음증, 노출증, 나르시시즘등에 바탕한 사이버 섹스나 시뮬레이션 같은 것이 점차 확산되어갈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이성 또는 동성과의 섹스를 전제로 하는 매매춘 역시 보다 당당한 직업윤리를 확보해 나갈 것이 틀림없다. 이는 금욕주의적 도덕관을 가진 이들이 아무리 한탄, 개탄해봤자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는 변화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선 '상품'을 보는 편견의 시정이다. 몸을 상품화한 것이든 정신을 상품화한 것이든, 우리는 여러 가지 '상품'을 교환하며 문화의 문명을 개발시켜 나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원시시대로 돌아가 이른바 '원시공산사회' 체제 안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이상, '상품화'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다니엘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주인공은 '상품'을 초월하여 기나긴 세월을 견뎌냈지만, 그 소설의 모델이 됐던 사람은 무인도에 갇힌 지 수년만에 발광한 상태로 구출됐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루소가 말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낭만적 유토피아니즘에서 나온 계몽적 구호였을 뿐이다.
물론 '악'에 속하는 '몸의 상품화'를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한다. 과거의 노예제도나 인신매매는 '몸의 상품화'의 가장 추악한 측면이다. 또한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적 계급이나 신분을 결정해 버리는 봉건적 사회제도 역시 악에 속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이 '상품'이 된 다음부터 그런 봉건적 신분제도가 무너지게 됐다는 사실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조선조 말엽에 가면 양반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는데, 이는 '양반'을 '돈'으로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몸의 상품화'가 봉건제도를 무너뜨렸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의 소비대중문화는 '쾌락'에 대한 솔직하고 동물적인 접근이 가능해지면서부터 비롯되었고, 대중들이 원하는 쾌락은 형이상학적 쾌락'이 아니라 '육체적 쾌락'이었다. 대중들의 육체적 쾌락을 억압했던 구시대의 봉건윤리는 언제나 '정신'의 중요성을 내세워 대중들의 '인권'이나 '행복추구권'을 막았고, 그러한 가치관은 '사공농상'의 개념으로 이어졌다. '상'이 가장 낮은 가치를 지닐 때 '사' 즉, 소수의 권력자들은 특권을 누렸다.
이런 사실을 되돌아볼 때 '상'에 대한 한국 지식인들의 알레르기적 반응은 수구적 봉건윤리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몸의 상품화' 현상은 정신을 지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수구주의자들의 복고주의에 반발하는 '민중적 저항'의 상징이나 '인간해방'의 상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마광수 저 <인간>(해냄출판사)에 수록)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상품화'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문화상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도 많아 이중적 양면성을 보이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는 인류가 교환경제 체제를 굳힌 이래 모든 것을 '상품화'시켜 문화발전을 가능케 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상기해 봐야 한다. 그러므로 '상품화'에 대해서 무조건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
학자는 '지식'을 상품화하여 생계를 유지함은 물론 학문의 진보에 기여한다. 또한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배우는 '외모'를 상품화하여 영화나 연극의 완성도를 높인다. 그런데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지식의 상품화'엔 상당히 관대한 시선을 보내면서도, '몸의 상품화'엔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런 현상이 조선조식 양반의식에 바탕한 정신우월주의적 가치관과 엄숙주의적 도덕관, 그리고 육체적 쾌락에 대한 소망과 경멸감 사이에서 야기되는 양가감정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모든 '지식의 상품화'가 관대하게 취급되는 것도 아니다.
아카데미즘적 경건주의에 함몰돼 있는 지식인들은 지식의 상품화에 대해서도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일이 많다. 대중적 학술서나 문화 비평적 에세이집 같은 것이 혹 많이 팔려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끼였을 경우, 그 책의 저자는 '지식을 상품화한 자'로 낙인찍혀 매도당하기 쉽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볼 때 '상품화'에 대한 비난에는, 그것이 정신의 상품화든 몸의 상품화든 '복합적인 질투의 심리'가 어느 정도 개입돼 있다는 것을 짐작해 알 수 있다.
나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두고 얘기하자면, 1989년에 출간한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반 이상이 문학비평으로 채워져 있는 일종의 문화비평적 에세이집이었다. 그런데 그 책이 꽤 많이 팔려나가자 상당수의 지식인들은 '성'을 상품화했다는 이유로 나를 비난했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내 책을 읽어보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 말하자면 제목만 보고 무조건 비난의 화살을 퍼부어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지식의 상품화, 그 가운데 특히 '성에 대한 지식의 상품화'에 대하여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이 상당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온몸으로 겪은 스트레스를 통해 체감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중국의 대성이라 불리는 공자는 자신의 정치학 지식을 상품화하여 제후들에게 팔기위해 전국을 주유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제자백가들이 자신의 학식을 상품화하여 정치일선에 뛰어들거나 제자들을 교육하여 생업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상품화'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선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럴 경우 결국 논란의 초점이 되는 것은 '몸의 상품화' 문제가 될 것인데, 정신 역시 '몸' 안에 포함돼 있는 기능의 일종이라고 볼 때 '몸의 상품화'가 무조건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몸의 상품화'에 대한 문제에 대해 심도있고 성의있게 생각해 보려면 우선 '몸'의 실체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대체로 우리 나라 지식인들은 '몸'과 '정신'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생각이다. 데카르트는 정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두뇌')이 육체를 지배한다고 생각하여 삼신이원론을 수립했고, 이는 서구 합리주의 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동양 전래의 육체관을 살펴보면 데카르트의 생각은 매우 어색한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두뇌 역시 몸의 일부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전통한의학 사상에 비춰보면 더욱 그렇다.
한의학 이론에서는 정신의 특별한 주관자로서의 '두뇌'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체를 주관하는 오장육부 가운데서 뇌가 빠져있는 것이다. 한의학 이론에 의하면 뇌의 정신활동을 지배하는 것은 오히려 뇌를 뺀 육체의 오장육부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심장이 생각을 지배한다고 보는데, 다른 장기인 폐장, 비장, 간장, 신장 역시 심장을 도와 정신을 지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 나라의 전래 관용어인 "허파에 바람이 들었다","간이 크다","쓸개가 빠졌다","심장이 내려앉았다"등은 그런 관점에서 만들어진 말들이다. 말하자면 정신이 과대망상에 빠지는 것은 뇌의 대사작용 이상 때문이 아니라 허파에 바람이 들었기 때문이요, 용감한 심성이 되는 것은 간이 크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이런 관점은 '정신'을 오히려 '몸'의 하위개념으로 보는 인식방법인데, 서구의 정신우월주의에 비해 훨씬 더 총체적인 인간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몸의 쾌락, 특히 성의 쾌락을 억압한 역사가 없었다.('중국 성풍속사'를 쓴 네덜란드의 풍속학자 R.H. 반 홀릭은 , 이점에 대해 특히 놀라워하고 있다.) 서구의 역사가 기독교 교리에 의한 몸의 억압, 또는 육체적 쾌락의 억압의 역사로 점철됐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 (17세기 말까지 계속된 집단적 모럴 테러리즘인 '마녀사냥'의 대상은 대부분 '섹시한 여자들'이었다.) 동양의 육체관이 서양의 육체관보다 훨씬 더 인성을 중시하는 휴머니즘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난다.
중국에서는 '성의 즐거움'이 건강증진법의 차원에서 검토되고 논의되었을 뿐, 윤리적 선,악의 차원에서 논의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소녀경'같은 성경은 중요한 대중의학서로 인정되었고, 이것은 인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인도 역시 '카마수트라'등의 성경을 지어 귀중한 저서로 취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의 상품화'와 '몸의 상품화'는 둘 다 같은 개념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몸 안에 정신이 있고 정신 안에 몸이 있기 때문이다. 정신의 쾌락과 몸의 쾌락은 등가성을 갖는 것이고, 어느 쪽이 좀더 고상하고 어느 쪽이 좀더 저열한 것은 아니다.
심각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철학책을 사가지고 읽으면서 맛보는 쾌감이나, 여성(또는 남성)의 선정적인 몸을 찍은 사진집을 사가지고 보면서 맛보는 쾌감은 똑같은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몸의 상품화'에 대해서만 유독 비난의 칼날을 들이대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지식인의 도덕적 보신주의 성향에서 나온 이중적 처신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많다.
몸의 상품화든 정신의 상품화든, '상품화' 문제에 대해 상당수의 지식인들은 대단히 이중적인 반응을 보인다. 앞서도 말했듯이 철학책을 출간하는 행위나 에로티시즘 소설을 출간하는 행위나, 무언가를 '상품화'하여 먹고 살아간다는 점에 있어서는 결국 마찬가지 행위이다. 고도의 로빈슨 크루소가 된다면 모르겠으되, '상품화'를 피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사회에서는 어떤 '상품화 행위'에 대해서는 그것을 교묘하게 호도하여 고귀한 행위로 격상시키려 한다거나, 어떤 '상품화 행위'에 대해서는 그것을 교묘하게 폄하하여 천박한 행위로 몰아붙이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를테면 학교 선생이 지식을 상품화하여 먹고 사는 것은 상품화가 아니라 '교육'이요, 육체 근로자가 몸을 상품화하여 먹고 사는 것은 상품화가 아니라 '고귀한 노동'이라는 식이다. 또 이와 반대되는 현상도 일어나는데, 미스 코리아 대회 같은 데서 아름다움을 경쟁하는 행위를 '몸의 저열한 상품화'로 보는 관점 같은 것이 그것이다. 에로티시즘 문학의 경우도 같다.
물론 '나쁜 상품화'와 '정당한 상품화'의 구별은 있을 수 있다. 여성(또는 남성)을 인신매매하여 매춘행위에 종사케 하는 것은 몸의 '나쁜 상품화'이다. 그리고 자신의 체력으로 노동을 하여 돈을 버는 것은 몸의 '정당한 상품화'이다. 또한 사이비 교리로 광신도를 모아 종교를 팔아먹는 행위는 정신의 '나쁜 상품화'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몸의 상품화'에 있어서만은 나쁜 상품화와 정당한 상품화의 구별이 애매한 것이 많다.(모든 시비와 논란은 여기서 나온다.)
이를테면 어떤 여성(또는 남성)이 스스로의 자유의사와 당당한 직업정신에 따라 매소행위를 하면서 (다시 말해서 접대부로 일하면서) 돈을 번다던가, 어떤 작가가 자시의 신념에 따라 성을 소재로하여(다시 말해서 성을 문학 상품화하여) 책을 써서 수입을 얻는다거나하는 행위 같은 것이 그렇다. 이런 행위에 대해서는 그것을 '나쁜 상품화'라고 봐야 할지 '정당한 상품화'라고 봐야 할지 판단이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먼저 후자의 경우를 놓고서 생각해 보자. 어떤 작가가 종교사상이나 진보적 이데올로기를 소재로하여 책을 써서 파는 행위를 두고서, 사람들은 그것을 '종교의 상품화'나 '이데올로기의 상품화'라는 꼬리표를 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앞뒤가 안 맞는 가치판단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런 소설 가운데 혹 나중에 가서 '명작'(이를테면 핸리 밀러의 '북회귀선' 같은 것)으로 판정된 작품에 대해서는 '성을 상품화한 소설'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발적 매소나 매춘의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판단이 어려워진다. 지금도 일부 선진국에서는 매춘업에 종사하는 남녀들이 자기네가 하는 일이 떳떳한 '직업'으로 인정해 주기를 요구하며 사회운동을 벌이고 있다. 아주 옛날에 신전에 소속된 매춘부들을 '신성한 이타심을 실천하려는 성스러운 직업인'으로 인정한 적도 있었다. 또 기독교의 성자로 불리는 어거스틴조차 매춘의 필요성을 인정하여 그것을 '하수도 역할'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사회의 경제상태가 호전되면 '돈 때문에 할 수 없이 몸을 파는 여성들'의 숫자는 확실히 줄어든다. 그러나 그 대신 '당당한 직업정신을 가지고 몸을 파는 여성들'의 숫자가 늘어나 매매춘은 여전히 존재하게 된다. 또한 여권이 신장되고 남녀평등 의식이 확산되면 몸을 파는 여성들뿐만 아니라 몸을 파는 남성들 역시 늘어나 매춘의 문제가 단지 여성문제만으로 국한되지 않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몸의 상품화'를 무조건 매도할 수만은 없게 되는 상황에 이른다. 왜냐하면 사회제도에 의한 '성의 억압'이 엄존하는 상황에서는 어떤 수단으로든 '성의 억압'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시도가 생겨나게 마련이고, 그런 시도 중의 하나가 매매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황금만능주의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모든 사태의 원인으로 지적될 수도 있다. 당당하게 몸을 판다 하더라도 그런 행위의 목적은 결국 '돈'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도 매매춘을 근절시키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매매춘의 문제는 '돈의 문제' 때문에 생기는 이 아니라 '욕망(즉 성욕)의 문제'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성을 억압하는 여러 사회문화적 요인들이 '몸의 상품화'를 초래하게 한다는 얘기다.
'몸의 간접적 상품화'라고 할 수 있는 에로티시즘 예술이나 포르노의 경우를 두고 생각해 보더라도, 그런 것들의 배후에는 대중들로 하여금 '성욕의 대리배설(또는 대리만족)'이라도 간절히 바라게끔 만드는 범사회적 성 억압 현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몸의 상품화' 현상에는 성문제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물론 '아름다운 몸'을 보면 음란한(?) 성욕이든 고상한 성욕이든 자연 성욕이 일어날 것이므로, 아름다움의 문제 역시 성문제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럴 경우 '아름다움'과 '성'은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름다움의 근본은 역시 '선정성'에 있다고 본다. 성스러운 아름다움의 극치라는 불교의 관세음보살상 같은 것이 좋은 예다. 관세음보살상은 대개 선정적이고 관능적인 몸매와 야한 장신구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찌 됐든 요즘 들어 '몸의 상품화' 문제의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은 역시 '아름다운 몸'이 아니라 '선정적인(즉 섹시한) 몸'이다.
고전적인 우아미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별로 비난의 화살을 보내지 않는다. 그러나 육감적인 관능미에 대해서는 대개 비난의 화살을 보내는 것이다.(아니 보내는 '척'하는지도 모른다.)
따져서 생각해보면, 육감적인 관능미가 고전적인 우아미를 압도하게 된 것은 사실 어느 정도의 '민주화'와 '성해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성이 단순한 '생식'의 차원을 넘어 '쾌락'의 차원으로 확대되고, '쾌락을 위한 성'에 대해 죄의식이 자유민주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쾌락을 위한 성이 소수 특권귀족의 전유물이었고, '고전적 우아미'가 미의 기준처럼 된 것은 귀족적 특권의식의 산물이었다. 우리 나라의 조선시대나 서구의 봉건시대 때는 치장이나 옷차림에까지도 신분계급에 따른 규제가 뒤따랐다. 자유민주주의의 발달은 성적 쾌락의 문제를 대중들의 '행복추구권'과 복지 및 인권의 차원에서 생각하도록 만들었고, 귀족적 아름다움에 맞서는 '천박한 아름다움'의 수주네 머물러 있던 '육감적 관능미'를 '보편적 아름다움'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또한 대중경제의 발달은 성의 문제 또는 성적 아름다움의 문제를 '밥'의 문제보다 더욱 중요한 관심사로 부상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관능적 몸매나 관능적인 화상, 치장, 옷차림 등에 대해 사람들이 큰 관심을 쏟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 보니 '관능적 아름다움'의 상품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독일의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는 그의 저서 '사랑과 사치와 자본주의'에서, 왕족과 귀족에게 국한되었던 성애적 사랑과 관능적 사치가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대중적 자본주의 및 시민혁명이 촉진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관능미의 상품화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은 이중적 시각을 갖고 있다. 유명한 화가가 그런 관능적 나체화(이를테면 앙그르의 <하렘의 목욕탕> 같은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예술'이라 부르고, 성인잡지에 실린 관능적 누드 사진 같은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외설'이라고 매도하는 것이 좋은 예다. 라파엘이 그린 성모상에서는 풍만한 가슴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젖가슴을 크게 만드는 성형수슬을 받은 여성은 자신의 몸을 '성적으로' 상품화했다는 이유로 비난받기 쉽다.
보수적 여성단체에서는 '미스코리아 대회'같은 것을 여는 것에 대해 한사코 반대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다. 하나는 '여성의 몸'을 상품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하나는 같은 여성의 몸이라도 '육감적 관능미'에만 중점을 두어 미를 평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지적사항에 관해서는, 남성 역시 자신의 몸매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지나친 비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스 코리아' 대회에 비해 '미스터 코리아'대회가 사람들의 관심을 못 끄는 이유는, 남성의 육체미가 여성의 육체미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사회제도는 남성들을 전쟁이나 노역에 동원하기 위해 그들이 아름다움을 가꿀 기회를 박탈해 버렸다. 그래서 요즘에는 여성같은 화사한 몸매를 갖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여장남성들의 수효가 급증하는 추세헤 있는데, 이는 '남성해방운동'의 신호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상당수의 남성들은 자신이 반드시 용감해야 하고, 투박한 육체를 가져야 하고, 힘이 세야 한다는 사실에 반발하고 있다. 물론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적은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가 여성들로 하여금 오직 '몸의 아름다움' 하나로만 신분상승의 길을 모색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름다움 자체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본다. 사회적 출세와는 상관없이 남성과 여성은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인대회든 미남대회든, 그것은 몸의 상품화가 아니라 단순한 경연대회일 뿐이다. 말하자면 씨름 등의 체육 경기나 노래부르기 대회 같은 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것이다.(최근에는 올림픽 대회에서 조차 리듬체조나 수중발레, 빙상 등에서 몸의 아름다움이 체력 못지않게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 지적사항인 '육감적 관능미' 문제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째서 나쁘냐고 거듭 반문하고 싶다. 사실 '지성미'라든가 '정신의 아름다움'같은 것은 그 실체가 지극히 애매모호하다. 남자든 여자든 이성을 볼 때 우선 상대방을 성적 대상으로 파악하게 마련이다. 이는 인간 역시 동물의 일종인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본다.
많은 인류학자들은 (대표적인 학자로 '인간보기'를 쓴 데즈먼드 모리스를 꼽을 수 있다.) 인간의 몸매가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형성되게 된 것이 '성적 유인'을 위한 진화과정의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간과 비슷한 동물인 유인원에겐 없는 풍만한 젖가슴이나 매끄러운 피부등은 모두 성적 애무를 위해 진화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직립을 하여 농경과 목축을 통해 잉여 에너지를 비축하게 된 뒤에 나타나게 된 현상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다른 동물들처럼 동면을 하지 않고 일정한 발정기 없이 1년 내내 섹스를 할 수 있게 된 뒤부터, 자신의 몸매를 '성적 심벌'로 진화시켜 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인간의 특성상 '육감적 관능미'가 솔직하게 상찬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이요 진보된 현상(질실에 대한 진일보한 접근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에서)이라 하겠다.
현대의 소비대중문화는 물신주의로부터 출발한다. '물신주의'란 말은 '페티시즘'을 번역한 것인데, 페티시란 말은 원래 어떤 마술적 의미를 가진 숭배물이나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를테면 돌이나 금속으로 만든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 같은 것이 페티시즘이다. 다른 말로 주물숭배라고도 할 수 있겠다.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자본론'에서 페티시즘에 대해 언급하고,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페티시는 '돈'이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비난을 퍼부은 바 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몸의 상품화'는 '몸의 물신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정신적 요소가 빠진 몸 자체만을 신격화시켜 그것을 숭배하는 행위가 '화폐숭배'와 연결되는 것이 바로 '몸의 상품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몸의 숭배'의 이면에는 그동안 인류를 괴롭혀왔던 '정신적 가치'또는 '형이상학적 가치'에 대한 반발심리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형이상학은 종교 또는 이성 우월주의 등으로 환치되어 인간의 본성을 오랫동안 억눌러왔다.
중세기적 가치관을 한마디로 뭉뚱그려 형이상학적 가치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런 가치관에 대한 반발로 르네상스가 이루어졌고, 르네상스의 연장선상에서 반형이상학적 유물론이 싹텄다. 반형이상학적 유물론은 정신주의에 반대하는 '육체주의'를 탄생시켰고, 육체주의는 곧바로 육체적 쾌락 중심의 가치관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육체적 쾌락은 곧 '물질적 행복'이나 '안락'과 동의어이기도 하므로, 거기서 부르주아 중심의 근대 산업혁명이 이루어지게 됐던 것이다.
부르주아적 가치관은 '돈'을 숭배하는 것이긴 하되 적어도 중세기적 종교독재나 형이상학적 독재보다는 한결 나은 행복을 보장해 주었다. 물론 초기에는 노동자들의 과도한 희생이 뒤따라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내세운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한 이후, 노동자들 역시 돈이나 물질적 행복에 경도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게 되었다. 구 소련이나 동구권 공산국가들의 붕괴는, 노동자들의 물질숭배나 돈 숭배를 지나치게 간과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몸 숭배'는 '정신숭배'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고, '몸'이 상품화 된다는 것은 화폐경제 체제하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중세기말에는 교황청에서 '면죄부'를 만들어 돈을 받고 팔기까지 했는데, 이는 기독교 정신을 팔아먹은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몸을 상품화 시키는 것이 정신을 상품화시키는 것보다는 한결 본성에 솔직한 행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육체적 노동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요구하는 '노동운동'은, '몸의 상품화'를 긍정적 측면에서 보다 적극화 시키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페티시즘을 물신숭배적 측면에서만 보지 않고 성적 측면에서 관찰할 수 있을 때, '몸의 상품화'가 지닌 긍정적 측면을 더욱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페티시즘은 곧 '미의 민주주의'로 이어지고, 미의 민주주의는 개성미의 확장에 따른 건강한 나르시시즘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몸의 상품화'와 '페티시즘', 그리고 '소비대중문화'가 연결될 때, 거기서 최소한의 '미적 자족감'이 생겨 인간의 마음을 보다 풍족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얘기다.
성적 의미의 페티시즘은 우리말 번역이 꽤 까다롭다. 절편음란증이라고 번역하는 학자도 있으나 그렇게 되면 페티시즘이 너무 변태성욕 같은 인상을 주기 쉽다. 그래서 나는 그 말보다는 차라리 '고착적 탐미애' 정도로 번역해서 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성적 의미의 페티시즘은 이성 신체의 특정한 부분이나 신체에 부착된 물건(장신구나 구두 등)을 '페티시' 즉 관능적 숭배물로 삼아, 그것을 보거나 접촉하면서 삽입성교 이상의 성적 극치감을 느끼는 심리를 가리킨다. 말하자면 '관능미에 대한 적극적인 몰입'이라고 할 수 있다.
'매력적이다'라는 말을 영어로는 'charming'이라고 하는데, 'charm'이라는 단어는 '마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charming'이라는 말의 뜻은 마술에 홀린다는 뜻이다.(매력의 '매'자에도 귀신 귀자가 들어있다.) 따라서 인간은 모두 어떤 이성이 지니고 있는 마술적 주물 즉 '페티시'에 홀려, 그것에 매력을 느끼고 사랑에 빠져든다고 할 수 있다.
페티시는 '성적 상징 역할을 하는 일부분'이라는 의미에서 심벌리즘과도 관계가 깊다. 어떤 특정한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거나 암시하는 것이 상징인데,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페티시는 '관능적 상상력의 확산을 위한 상징적 자극물'이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다 페티시스트로서의 성 취향을 갖고 있다. 누구나 어떤 이성을 처음 볼 때 다리나 머리카락이나 손 등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곳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머릿결이 고운 남자만 보면 미쳐"라고 말하는 여자도 있고, "나는 다리가 미끈하게 뻗은 여자만 보면 미쳐"라고 말하는 남자도 있다.
남성이 갖는 페티시즘의 일반적인 대상은 여자의 피부색, 머리색, 손 및 손톱, 발, 머리카락, 젖가슴, 다리, 엉덩이, 배꼽등을 비롯하여 속옷, 장갑, 털코트, 그물 스타킹, 꽉 끼는 가죽옷, 노출이 심한 의상, 긴 부츠, 하이힐, 독특한 화장, 코걸이, 배꼽걸이, 젖꼭지걸이, 음순걸이류의 특이한 장신구 등이다.
여성도 남성에게서 페티시즘적 흥분을 느낀다. 그럴 경우 그 대상이 되는 것은 머리카락, 피부색, 콧수염, 어깨, 다리, 엉덩이, 손, 가슴털, 관능적 의상, 목걸이나 귀걸이 류의 장신구 등 여성의 페티시와 대동소이하다.
페티시즘을 미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그것은 변태성욕이라기보다 현대에 이르러 자유화 추세에 따라 달라지기 시작한 '미적 관점의 변화'를 반영하는 심리라고 할 수 있다. 즉, 미의 기준이 획일적 균형미에서 다양한 개성미로, 그리고 고전적이고 귀족적인 우아미에서 관능적이고 대중적인 퇴폐미로 바뀌어가는 경향을 지배하고 있는 심리가 바로 페티시즘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미적 기준은 균제와 조화로서,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우아한 미모를 이상으로 하였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도래와 함께 미의 이상은 바뀌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의 대두와 더불어 "관능적인 것은 어떤 것이든 아름답다"는 쪽으로 의식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여성의 경우, 예전에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다분히 획일적이었다. 우리나라 조선조 때는 앵두같은 입술, 초생달 같은 눈썹, 세류같이 가는 허리, 처마처럼 흐른 어깨라야 되었다. 유방이 커서도 안되고, 키가 커서도 안 됐다. 눈도 발도 다 작아야만 했다.
특히 기준이 제일 엄격했던 것은 얼굴의 모양새였다. 참외쪽 같기도 하고 계란 같기도 한 갸름한 얼굴형이어야만 미인으로 쳤다. 무엇보다 이마의 모양이 아주 중요했다. 요즘처럼 이마를 푹 가리는 헤어스타일은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시대였으므로, 단아하게 머리를 위로 빗어올려 땋든, 쪽을 찌든, 다리(가발)을 얹든 간에 좌우지간 이마가 반듯하면서 넓지도 좁지도 않아야 했다.
이런 형의 미녀가 되려면 미모를 타고난, 그것도 인습적으로 규정된 미모를 타고난 여인이라야만 가능하다. 시대에 따라 미의 기준은 조금씩 달라지게 되지만, 아무튼 주로 '전체적인 조화'와 '타고난 미모'가 미인의 기준이 되었던 것은 동서양이 다 같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대 이후 현대에 들어와서는, 아름다움이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새로운 신념이 사람들 사이에 싹텄다. 특히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고 선언하여 예줄적 인공미를 강조함으로써, 자연미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자기의 단점을 커버하고 장점을 살리는 식의 미용법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마가 너무 넓거나 좁으면 머리카락으로 푹 가리면 되고, 광대뼈가 나무 나왔으면 머리를 좌우로 늘어뜨려 뺨을 가리면 된다는 식이다. 거꾸로 이마가 예쁘면 머리를 모두 뒤로 빗어넘겨 이마를 드러내면 된다. 또한 화장술과 성형수술의 발달은 외모상의 단점을 보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와 동시에 '몸'에 관련된 산업, 이를테면 화장품 제조업이나 패션산업, 장신구나 가발 제조업 같은 것들이 대중적 수요의 확산에 의해 크게 발전하여 경제적 풍요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페티시즘은 누구나 관능적인 사람이 될 수 있게끔 하는 '개성적 매력의 창출'에 큰 역할을 한다. 성형수슬을 통해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것도 미적 평등에 기여한 커다란 발전이긴 하지만, 아직도 '전체적인 조화미'를 겨냥한다는 점에서 충분한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부분적인 강렬함'으로 '전체적인 조화미'를 압도할 수 있을 때, 누구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다고 본다.
그렇게 되면 개개인은 누구나 자기의 기호와 관능적 상상력을 살려 각자의 '페티시'를 당당하게 개발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여자의 경우라면 '화장을 전혀 안하고 장신구도 안 한 여자가 진정 아름다운 여자'라는 자연미의 환상으로부터 해방되어, 각자 스스로의 페티시를 통해 나르시시즘을 즐기면서, 아울러 자기가 가꾼 페티시에 집착하는 이성과의 사랑도 가능하지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특별히 긴 머리카락이나 특별히 긴 손톱을 페티시로 가꿀 경우, 그 페티시가 풍기는 관능적 매력은 전체적인 조화, 균형미를 훨씬 능가할 수 있다. 그리고 긴 머리카락이나 긴 손톱에 특별히 지속적인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럴 때 '패티시의 상품화'는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 가발이나 모조손톱 같은 것은 '몸의 상품화'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라, 미적 평등의식에 기반을 두는 당당한 나르시시즘에 이바지하는 심리적 보조물이다.
'전체적으로 완벽한 미'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 쳐도 그것은 관념적인 것이어서 성적인 것과는 무관하다. 성적인 아름다움만이 진정한 아름다움이요 실용적 아름다움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있는 '외모 콤플렉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몇몇 기업가들이 유행심리를 조작하여 만들어낸 획일적인 헤어스타일이나 획일적인 의상등은 이제 차츰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는 다리가 예쁜 여성은 짧은 치마를, 다리가 미운 여성은 긴 치마를 입을 권리가 있다. 화장도 전체적인 화장에서 부분 화장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또 남성들의 복장이나 헤어스타일 역시 점점 더 개성화되고 관능적으로 되어간다.
그러나 이러한 '개성미의 확장'이 단지 스스로의 단점을 커버하는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보다 대담하게 스스로의 패티시를 창조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러려면 각자의 개성적 패티시를 인정해줄 수 있는 다원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회풍토의 확립이 시급하다. 각자의 개성적 패티시를 적극적 성애를 위한 상징적 자극물로 수용하는 자세가 사회적으로 정착될 수 있다면 인간은 관념적, 도덕적으로 강제된 획일적 미학으로부터 해방되어 누구나 창조적 관능미를 가꿔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이 그리워하는 원초적인 마음의 고향은 물론 아담과 이브가 벌거벗고 뛰어 놀던 에덴 동산이다. 그러나 나체주의로 돌아간다고 해서 우리가 다시금 행복을 보장받을 수는 없다.
우리는 차라리 애초에 수치심의 표상으로 생겼던 '무화과 잎사귀'를 자연미에 대항하는 '개성적 패티시'로서의 '관능적 창조물', 즉 '관능적 상품'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인간은 신의 피조물로서의 '숙명'과 자연법칙에 종속된 '생식적 섹스'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리고 인공적 아름다움과 창조적 성이 일체화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관능적 상품'으로서의 패티시는 색색가지 가발이나 모조손톱뿐만 아니라, 개성적인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팬티, 속옷, 인조 속눈썹, 장신구, 색조 화장품, 하이힐, 선정적인 의상등 수없이 많다.
지금까지 변태성욕의 하나로만 간주됐던 패티시즘을 현대인의 모든 생활미학에 적용하여 당당하게 상품화시킬 수 있을 때, 개개인의 미의식과 성관은 창조적 발전의 전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관념적 자유가 아닌 실제적 자유 즉 '몸의 자유'를 쟁취할 수 있게 된다. 실제적 자유의 쟁취는 '관능적 쾌락추구의 정당성'이 보편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풍토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의 소비대중문화는 '몸의 아름다움'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결국 '패티시의 상품화'로 나타나 일반 대중의 미적 평등에 기여한다. 성의 상품화 역시 성 자체보다는 '관능미'의 상품화로 발전하여, 성이 소유와 피소유의 형태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미적 완상'의 형태로 구현되어 가는 경향이 있다.
생식적 성보다는 비생식적 성이 보편화되고, 이성간의 합일에 의한 성만이 아니라 혼자서 즐기는 성, 즉 관음증, 노출증, 나르시시즘등에 바탕한 사이버 섹스나 시뮬레이션 같은 것이 점차 확산되어갈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이성 또는 동성과의 섹스를 전제로 하는 매매춘 역시 보다 당당한 직업윤리를 확보해 나갈 것이 틀림없다. 이는 금욕주의적 도덕관을 가진 이들이 아무리 한탄, 개탄해봤자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는 변화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선 '상품'을 보는 편견의 시정이다. 몸을 상품화한 것이든 정신을 상품화한 것이든, 우리는 여러 가지 '상품'을 교환하며 문화의 문명을 개발시켜 나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원시시대로 돌아가 이른바 '원시공산사회' 체제 안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이상, '상품화'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다니엘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주인공은 '상품'을 초월하여 기나긴 세월을 견뎌냈지만, 그 소설의 모델이 됐던 사람은 무인도에 갇힌 지 수년만에 발광한 상태로 구출됐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루소가 말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낭만적 유토피아니즘에서 나온 계몽적 구호였을 뿐이다.
물론 '악'에 속하는 '몸의 상품화'를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한다. 과거의 노예제도나 인신매매는 '몸의 상품화'의 가장 추악한 측면이다. 또한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적 계급이나 신분을 결정해 버리는 봉건적 사회제도 역시 악에 속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이 '상품'이 된 다음부터 그런 봉건적 신분제도가 무너지게 됐다는 사실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조선조 말엽에 가면 양반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는데, 이는 '양반'을 '돈'으로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몸의 상품화'가 봉건제도를 무너뜨렸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의 소비대중문화는 '쾌락'에 대한 솔직하고 동물적인 접근이 가능해지면서부터 비롯되었고, 대중들이 원하는 쾌락은 형이상학적 쾌락'이 아니라 '육체적 쾌락'이었다. 대중들의 육체적 쾌락을 억압했던 구시대의 봉건윤리는 언제나 '정신'의 중요성을 내세워 대중들의 '인권'이나 '행복추구권'을 막았고, 그러한 가치관은 '사공농상'의 개념으로 이어졌다. '상'이 가장 낮은 가치를 지닐 때 '사' 즉, 소수의 권력자들은 특권을 누렸다.
이런 사실을 되돌아볼 때 '상'에 대한 한국 지식인들의 알레르기적 반응은 수구적 봉건윤리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몸의 상품화' 현상은 정신을 지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수구주의자들의 복고주의에 반발하는 '민중적 저항'의 상징이나 '인간해방'의 상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마광수 저 <인간>(해냄출판사)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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