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편협한 도그마가 서양의 몰락을 자초하고 있다고 단언한 20세기의 대표적 철학자는 버트란드 러셀이다. 그는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저서에서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호전적 성격과 이기적 배타주의를 신랄하게 공격한 바 있다. 나는 교회에 열심히 나가던 고등학교시절에 이 책을 잃고 크게 감명받아, 종교든 이데올로기든 어떠한 형태의 <주의>라도 그것이 결국은 정치적 압제와 자연파괴의 수단으로 화해 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러셀의 또 다른 저서인 [새 세계의 새 희망 New Hopes For a Changing World,1951]을 읽고, 이데올로기의 광신화(狂信化) 현상이 인류의 파멸을 재촉하고 있다고 진단한 그의 예리한 문명비판적 안목에 크게 감복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적 이데올로기가 서구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서구의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거의 합의된 사항이 된 듯 하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 자체가 전혀 쓸데없는 과거의 유물로 사장(死藏)되어 버려야만 하는 것일까. 러셀은 중세 이후 서구의 암울한 독재체제와, 오만한 백인 우월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제국주의적 식민정책 등의 책임을 모두 예수 개인에게 돌리고 있지만, 나는 꼭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이 잘못된 방향으로 이용되어, 1천여 년 간의 중세 암흑시대와 같은 질곡의 역사를 초래하는 데 근원적 원인으로 작용한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사랑철학> 자체가 매도되거나 심판받아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도 늘 지적하였듯이, 예수가 말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아들>로서의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의 문화적 천재성에 의해서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로 표현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 이후의 기독교 철학자들(대표적인 인물로 바울을 꼽을 수 있다. 신약성경 중 바울이 쓴 많은 서간들, 특히 <로마서>는 예수의 상징적 설교들을 규범적 명령으로 바꾸어 놓는 잘못을 저질렀다)은 개인적 명예욕과 권력욕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을 교묘히 부회(附會)시켜, 민중착취의 수단으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교형태로서의 기독교가 갖고 있는 교리보다도 예수라는 한 젊은 종교개혁자가 가지고 있었던 계시적 철학으로서의 <사랑>에 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매겨 주고 싶다. 소위 인류역사상 <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들 가운데, 인류의 평화와 복지를 위한 정신적 처방으로 <사랑>을 제시한 인물은 예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공자가 말한 <인(仁)>이나 석가모니가 설파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정신, 또는 소크라테스의 <자아의 본질확인> 등도 귀중한 진리이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랑>만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공자나 석가, 그리고 소크라테스 등의 성현들이 주장한 인류구제의 처방은 결국 윤리적 실천으로서의 당위론적 도덕률들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가 말한 사랑은 단지 정신적 실천 윤리로서의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를 아울러 포괄하는 <인간실존의 본질로서의 사랑>을 의미하고 있다. 특히 그의 사랑의 개념 안에는 육체적 접촉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즉 다시 말하여 인간의 기본적 본능으로서의 성욕을 인정하는 것 같은 여운을 풍긴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확인해 온 사랑의 가치를 제대로 활용하여 그것을 인류파멸을 막는 새로운 복음으로서 받아들이려면, 중세 기독교 철학자들이 예수의 사랑을 단지 정신적 윤리의 차원에서 해석했던 오류에서 벗어나, 정신과 육체를 통괄하는 일원론적 관점에서 받아들여야만 한다.
또한 내가 보기에 인류가 지금까지 사랑의 가치를 누누이 외쳐 대면서도 실제로 인류평화와 복지를 실현시키지 못했던 근본적 원인은, 사랑의 개념에 반드시 내포되어야만 하는 <아름다움>의 요소를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여 예수의 사랑을 사랑 그 자체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성적 즐거움이 수반되는 사랑, 아름다운 심미감(審美感)이 수반되는 사랑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 인류의 앞날은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지상의 천국>을 향해 달려나가게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이, 육체적 접촉과 아름다움의 향수(享受)를 아울러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내가 확신하게 된 것은, [신약성서]<요한복음> 12장에 나와 있는 예수와 마리아의 사랑의 교환장면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부분을 그대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 그때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그때 유다가, [이 향유를 팔았더면 삼백 데나리온을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말라.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읽는 이에게 참으로 드라마틱한 감동으로 전달되는 이 장면은, 상징적 암시성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의 상징적 모티프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예수에 대한 마리아의 지극한 사랑>이다. 둘째는, 그 사랑이 단순히 정신적 교류로서만 표현되지 않고 구체적이고 육체적인 <접촉(touch)>의 형태로 표현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향유를 가지고 예수의 발을 닦아 드리고 한술 더 떠 마리아의 긴 머리털로 수건 대신 예수의 발을 훔쳤다는 부분에서, 나는 다른 어떠한 애무보다도 더욱 관능적인 <페팅 (petting)>의 이미지를 내 감각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받을 수 있었다. 셋째는, 마리아의 긴 머리털이 보여 주는 <아름다운 페티쉬(fetish)>로서의 역할이다.
페티쉬란 신체의 일부분을 극단적으로 미화시켜 관능적 심벌로 만들고, 다시 그것을 육체적 애무에 사용할 때 붙이는 용어이다. 말하자면 페티쉬란 <성적(性的) 숭배물>이요 성적 페팅의 도구인데, 페티쉬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긴 머리털이다. 이 밖에 손이나 발, 뾰족구두, 긴 손톱, 여러 가지 장신구 등이다
페티쉬의 역할을 하는데,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쓰이는 페티쉬가 바로 <여인의 긴 머리털>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름다움이 단지 아름다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구체적 표현 형태인 애무나 살갗접촉(skinshiP)의 촉매제 역할을 할 때 비로소 그 본연의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서에는 긴 머리카락을 힘의 원천으로서의 상징으로 쓰거나 또는 사랑의 행위를 위한 페티쉬 역할에 사용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머리카락을 힘의 원천의 상징으로 삼은 것은 [구약성서] <판관기(判官記)> 13장에 나오는 투사 삼손의 이야기에서이다. 삼손이 요부 데릴라의 유혹에 빠져, 그녀에 의해 자신의 긴 머리칼이 잘라져 나간 후에는 완전히 무력해져서 결국 적의 포로가 되고 만다는 내용이다.
또한 여인의 긴 머리카락이 관능적 페티쉬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고 있는 것은 [구약성서] <아가서(雅歌書)>의 경우이다. 사랑스런 여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여인의 길고 풍성한 머리채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은 언제나 사랑의 즐거움을 더해 주는 <아름다운 심벌>로 표현되고 있다.
예수와 마리아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구체적 교환행위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름다움>과 <성적 접촉>을 포함하고 있기에 그 사랑의 밀도를 더욱 완전무결한 것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제자 유다의 투덜거림에 대해 예수가 대답한 말도 많은 상징적 시사점을 내포하고 있다. 즉,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적선행위는 당위적 윤리에 속하는 문제이고, 마리아와 예수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접촉은 감성적 본능의 영역에 속하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본능적 사랑이 윤리적 행동이나 도덕적 관념보다도 더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는 곧 십자가에 못박혀 속죄양이 될 운명이란 것을 예수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보여 준 사랑의 표현행위가 아무리 순간적 해프닝에 불과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에게는 너무나 감동 깊은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말하자면 사랑이란 결국 <순간의 진실>과 <순간의 아름다움>만으로도 충분히 그 가치와 효용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예수는 생각했던 것이다. 개인적 사랑이 먼저냐, 도덕적 당위(當爲)가 먼저냐 하는 딜레마에 빠지기 쉬운 요즘의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개인적 사랑이 먼저라고 예수가 확고한 어조로 언명해 준 성경의 기록이 새로운 각성의 계기로 작용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에 있어 정신적인 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것은 곧바로 성적 기아증(飢餓症)으로 연결되어 변태적 욕구로 발산되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새디스틱한 파괴욕이나 공분(公憤)을 위장한 개인적 적개심의 형태를 띠기 쉽다. 또한 사랑에 있어 아름다움의 요소를 분리시켜 버린다면 우리는 동물적 성욕이나 원시적 생식욕(生殖慾)의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 조물주가 인간에게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일년내내 성행위탈론 성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의 페팅을 위주로 하는)의 즐거움을 허락해 준 것은, 인간이 사랑의 행위에 아름다운 심미감을 곁들일 수 있는 능력, 즉 <관능적 상상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逆)으로 성적인 아름다움이 배제된 순수한 아름다움 그 자체만을 강조한다고 할 때, 그것은 현실도피적인 극단적 탐미주의로 흘러 우리의 삶과 유리되기 쉽다.
아름다움은 우리들을 사랑의 황홀경에 빠져들게 하고 사랑의 황홀경은 우리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요즘 중고등학생들에게 자유복장을 허용하고 또 남녀공학이 늘어나게 되면서부터, 남학생들의 거칠고 전투적인 매너가 차츰 사라져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당연한 결과이다. 예전처럼 머리를 빡빡 깎게 하고 시커먼 유니폼을 입혀 한창 사랑에 갈증을 느끼는 시기인 사춘기의 소년소녀들에게서 미의식을 박탈해 버릴 때, 그것에 대한 반동작용으로 적개심과 신경질이 늘어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만약 군인들에게 자유복장을 허용하고 머리를 마음대로 기르게 하고 몸치장을 하게 한다고 가정해 보라. 그들에게서 전투적 심리가 사라지고 결국은 전의(戰意)를 상실하고 말 것이 뻔하다. 두 나라가 서로 싸울 때, 한쪽 나라의 군인들만 멋을 낸다면 그 나라는 패전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두 나라 군인들이 다같이 멋에 관심을 쓴다고 가정하면 결국 전쟁 자체가 없어지고 인류는 평화로운 질서와 사랑의 기쁨을 드디어 향유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아름다움을 단지 유미주의자의 헛된 현실도피 욕구의 상징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아름다움>이야말로 인류역사에서 도저히 없앨 수 없었던 전쟁을 근절시킬 수 있고 또한 착취적 성욕으로서가 아니라 평화스럽고 예술적인 성욕의 표현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소중한 가치요 철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요즘 <야한 여자>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더 나아가 여자뿐만 아니라 모든 남녀들이 다 야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야한 아름다움이 결코 사치와 퇴폐의 상징으로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이 모두 다 본능적 욕구의 당당한 표현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야성미(野性美)를 발휘할 수 있을 때, 이 세계는 비로소 상쟁(相爭)을 멈추고 사랑의 낙원으로 바뀌어질 수 있다.
기독교적 이데올로기가 서구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서구의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거의 합의된 사항이 된 듯 하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 자체가 전혀 쓸데없는 과거의 유물로 사장(死藏)되어 버려야만 하는 것일까. 러셀은 중세 이후 서구의 암울한 독재체제와, 오만한 백인 우월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제국주의적 식민정책 등의 책임을 모두 예수 개인에게 돌리고 있지만, 나는 꼭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이 잘못된 방향으로 이용되어, 1천여 년 간의 중세 암흑시대와 같은 질곡의 역사를 초래하는 데 근원적 원인으로 작용한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사랑철학> 자체가 매도되거나 심판받아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도 늘 지적하였듯이, 예수가 말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아들>로서의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의 문화적 천재성에 의해서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로 표현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 이후의 기독교 철학자들(대표적인 인물로 바울을 꼽을 수 있다. 신약성경 중 바울이 쓴 많은 서간들, 특히 <로마서>는 예수의 상징적 설교들을 규범적 명령으로 바꾸어 놓는 잘못을 저질렀다)은 개인적 명예욕과 권력욕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을 교묘히 부회(附會)시켜, 민중착취의 수단으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교형태로서의 기독교가 갖고 있는 교리보다도 예수라는 한 젊은 종교개혁자가 가지고 있었던 계시적 철학으로서의 <사랑>에 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매겨 주고 싶다. 소위 인류역사상 <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들 가운데, 인류의 평화와 복지를 위한 정신적 처방으로 <사랑>을 제시한 인물은 예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공자가 말한 <인(仁)>이나 석가모니가 설파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정신, 또는 소크라테스의 <자아의 본질확인> 등도 귀중한 진리이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랑>만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공자나 석가, 그리고 소크라테스 등의 성현들이 주장한 인류구제의 처방은 결국 윤리적 실천으로서의 당위론적 도덕률들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가 말한 사랑은 단지 정신적 실천 윤리로서의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를 아울러 포괄하는 <인간실존의 본질로서의 사랑>을 의미하고 있다. 특히 그의 사랑의 개념 안에는 육체적 접촉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즉 다시 말하여 인간의 기본적 본능으로서의 성욕을 인정하는 것 같은 여운을 풍긴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확인해 온 사랑의 가치를 제대로 활용하여 그것을 인류파멸을 막는 새로운 복음으로서 받아들이려면, 중세 기독교 철학자들이 예수의 사랑을 단지 정신적 윤리의 차원에서 해석했던 오류에서 벗어나, 정신과 육체를 통괄하는 일원론적 관점에서 받아들여야만 한다.
또한 내가 보기에 인류가 지금까지 사랑의 가치를 누누이 외쳐 대면서도 실제로 인류평화와 복지를 실현시키지 못했던 근본적 원인은, 사랑의 개념에 반드시 내포되어야만 하는 <아름다움>의 요소를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여 예수의 사랑을 사랑 그 자체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성적 즐거움이 수반되는 사랑, 아름다운 심미감(審美感)이 수반되는 사랑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 인류의 앞날은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지상의 천국>을 향해 달려나가게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이, 육체적 접촉과 아름다움의 향수(享受)를 아울러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내가 확신하게 된 것은, [신약성서]<요한복음> 12장에 나와 있는 예수와 마리아의 사랑의 교환장면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부분을 그대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 그때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그때 유다가, [이 향유를 팔았더면 삼백 데나리온을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말라.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읽는 이에게 참으로 드라마틱한 감동으로 전달되는 이 장면은, 상징적 암시성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의 상징적 모티프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예수에 대한 마리아의 지극한 사랑>이다. 둘째는, 그 사랑이 단순히 정신적 교류로서만 표현되지 않고 구체적이고 육체적인 <접촉(touch)>의 형태로 표현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향유를 가지고 예수의 발을 닦아 드리고 한술 더 떠 마리아의 긴 머리털로 수건 대신 예수의 발을 훔쳤다는 부분에서, 나는 다른 어떠한 애무보다도 더욱 관능적인 <페팅 (petting)>의 이미지를 내 감각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받을 수 있었다. 셋째는, 마리아의 긴 머리털이 보여 주는 <아름다운 페티쉬(fetish)>로서의 역할이다.
페티쉬란 신체의 일부분을 극단적으로 미화시켜 관능적 심벌로 만들고, 다시 그것을 육체적 애무에 사용할 때 붙이는 용어이다. 말하자면 페티쉬란 <성적(性的) 숭배물>이요 성적 페팅의 도구인데, 페티쉬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긴 머리털이다. 이 밖에 손이나 발, 뾰족구두, 긴 손톱, 여러 가지 장신구 등이다
페티쉬의 역할을 하는데,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쓰이는 페티쉬가 바로 <여인의 긴 머리털>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름다움이 단지 아름다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구체적 표현 형태인 애무나 살갗접촉(skinshiP)의 촉매제 역할을 할 때 비로소 그 본연의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서에는 긴 머리카락을 힘의 원천으로서의 상징으로 쓰거나 또는 사랑의 행위를 위한 페티쉬 역할에 사용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머리카락을 힘의 원천의 상징으로 삼은 것은 [구약성서] <판관기(判官記)> 13장에 나오는 투사 삼손의 이야기에서이다. 삼손이 요부 데릴라의 유혹에 빠져, 그녀에 의해 자신의 긴 머리칼이 잘라져 나간 후에는 완전히 무력해져서 결국 적의 포로가 되고 만다는 내용이다.
또한 여인의 긴 머리카락이 관능적 페티쉬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고 있는 것은 [구약성서] <아가서(雅歌書)>의 경우이다. 사랑스런 여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여인의 길고 풍성한 머리채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은 언제나 사랑의 즐거움을 더해 주는 <아름다운 심벌>로 표현되고 있다.
예수와 마리아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구체적 교환행위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름다움>과 <성적 접촉>을 포함하고 있기에 그 사랑의 밀도를 더욱 완전무결한 것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제자 유다의 투덜거림에 대해 예수가 대답한 말도 많은 상징적 시사점을 내포하고 있다. 즉,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적선행위는 당위적 윤리에 속하는 문제이고, 마리아와 예수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접촉은 감성적 본능의 영역에 속하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본능적 사랑이 윤리적 행동이나 도덕적 관념보다도 더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는 곧 십자가에 못박혀 속죄양이 될 운명이란 것을 예수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보여 준 사랑의 표현행위가 아무리 순간적 해프닝에 불과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에게는 너무나 감동 깊은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말하자면 사랑이란 결국 <순간의 진실>과 <순간의 아름다움>만으로도 충분히 그 가치와 효용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예수는 생각했던 것이다. 개인적 사랑이 먼저냐, 도덕적 당위(當爲)가 먼저냐 하는 딜레마에 빠지기 쉬운 요즘의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개인적 사랑이 먼저라고 예수가 확고한 어조로 언명해 준 성경의 기록이 새로운 각성의 계기로 작용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에 있어 정신적인 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것은 곧바로 성적 기아증(飢餓症)으로 연결되어 변태적 욕구로 발산되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새디스틱한 파괴욕이나 공분(公憤)을 위장한 개인적 적개심의 형태를 띠기 쉽다. 또한 사랑에 있어 아름다움의 요소를 분리시켜 버린다면 우리는 동물적 성욕이나 원시적 생식욕(生殖慾)의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 조물주가 인간에게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일년내내 성행위탈론 성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의 페팅을 위주로 하는)의 즐거움을 허락해 준 것은, 인간이 사랑의 행위에 아름다운 심미감을 곁들일 수 있는 능력, 즉 <관능적 상상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逆)으로 성적인 아름다움이 배제된 순수한 아름다움 그 자체만을 강조한다고 할 때, 그것은 현실도피적인 극단적 탐미주의로 흘러 우리의 삶과 유리되기 쉽다.
아름다움은 우리들을 사랑의 황홀경에 빠져들게 하고 사랑의 황홀경은 우리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요즘 중고등학생들에게 자유복장을 허용하고 또 남녀공학이 늘어나게 되면서부터, 남학생들의 거칠고 전투적인 매너가 차츰 사라져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당연한 결과이다. 예전처럼 머리를 빡빡 깎게 하고 시커먼 유니폼을 입혀 한창 사랑에 갈증을 느끼는 시기인 사춘기의 소년소녀들에게서 미의식을 박탈해 버릴 때, 그것에 대한 반동작용으로 적개심과 신경질이 늘어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만약 군인들에게 자유복장을 허용하고 머리를 마음대로 기르게 하고 몸치장을 하게 한다고 가정해 보라. 그들에게서 전투적 심리가 사라지고 결국은 전의(戰意)를 상실하고 말 것이 뻔하다. 두 나라가 서로 싸울 때, 한쪽 나라의 군인들만 멋을 낸다면 그 나라는 패전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두 나라 군인들이 다같이 멋에 관심을 쓴다고 가정하면 결국 전쟁 자체가 없어지고 인류는 평화로운 질서와 사랑의 기쁨을 드디어 향유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아름다움을 단지 유미주의자의 헛된 현실도피 욕구의 상징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아름다움>이야말로 인류역사에서 도저히 없앨 수 없었던 전쟁을 근절시킬 수 있고 또한 착취적 성욕으로서가 아니라 평화스럽고 예술적인 성욕의 표현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소중한 가치요 철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요즘 <야한 여자>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더 나아가 여자뿐만 아니라 모든 남녀들이 다 야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야한 아름다움이 결코 사치와 퇴폐의 상징으로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이 모두 다 본능적 욕구의 당당한 표현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야성미(野性美)를 발휘할 수 있을 때, 이 세계는 비로소 상쟁(相爭)을 멈추고 사랑의 낙원으로 바뀌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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