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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판 페레스트로이카 / 박호성

OKeverything 2007. 2. 11. 21:50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는 주인공 김범우가 한국의 습속을 경멸하는 미군 정보장교를 향하여 한국과 미국, 두 나라의 역사적 전통을 비교하며 다음과 같은 비판을 퍼붓는 장면이 나온다.

“너희들이 우리와 다른 건, 너희들은 민족이 없고 우리는 민족이 있다는 점이다. 너희들은 여러 인종들이 모여들어 국가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우리들은 하나라는 민족의 토대 위에서 국가를 만들었지. 그 차이가 뭔가 하면, 너희들은 수평적 연결만 있지 수직적 유대가 없어. 그러나 우린 그 두 가지를 다 갖추고 있는 거야.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너희들은 국가조직이 깨지면 산산이 흩어지게 돼 있어. …… 그러나 우리는 달라. 국가라는 수평조직이 없어져도 민족이란 수직조직으로 한 덩어리를 이루며 절대로 흩어지지 않아”.

요컨대 미국은 물리적으로만 결합되어 있는 탓에, 일정한 외부 작용만 가해지면 쉽게 와르르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 나라라는 말인 것이다. 역시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미국을 뭉치게 만들까?

다 알다시피,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는 질적으로 판이하게, 미국의 건국 역사는 지극히 짧다. 유럽은 문화적으로나 관습적인 차원에서 단합된 하나의 민족으로 엮어져, 오랫동안 굳게 뭉쳐왔다. 요컨대 민족적 결속이 끈질기게 이루어진 장구한 역사적 전통을 갖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미국은 민족국가적 전통도 대단히 짧고,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서로 이질적인 집단들이 인위적으로 난마처럼 얽혀 있는 꼴이다. 이러한 형편이니, 이들을 하나로 묶어낼 접착제를 찾기가 그리 손쉽지 않음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미국 국민을 급속히 하나로 결속시킬 수 있는 가장 유용하고 손쉬운 국민통합 수단의 하나가 대외전쟁이라는 게 중론이다. 우리는 해외에서 조그만 전투나 전쟁이 발발하면, 날로 떨어지던 미국 대통령의 인기가 급상승하곤 하던 경우를 드물지 않게 목격한 적도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추락하는 대통령의 인기 만회를 위해, 대외전쟁이 의도적으로 부추겨지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는 말도 된다. 이를테면 미국이 이끌어 가는 해외 전쟁이 미 국민의 ‘민족적’ 통합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미 국민의 ‘인권’

동유럽이 아직도 공산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시절이었는데도, 미국의 보수적인 경제학자 갈브레이스가 이런 말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더 나은 삶을 찾는 사람 가운데, 동독의 동베를린에서 뉴욕의 (빈민가) 싸우스 브롱크스(South Brox)로 이주할 사람이 하나도 없으리라는 것은, 끔찍하지만 조금도 어김없는 사실이다”라고.

반공주의에 잘 길들여진 처지임에도, 그 역시 미국 자본주의가 빚어낸 비참한 사회적 현실의 한 단면을 결코 부인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특히 공산국가들을 향하여, 가령 자유와 인권 문제를 들어 설교를 늘어놓거나, 아니면 요란스럽게 압력을 가하길 즐기는 편이다. 그러나 이런 미국에 대해 가령 중국은 어떤 자세를 보일까?

예컨대 1991년 12월4일자 중국 〈인민일보〉는, 미국이 수백만 자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라 할 수 있는 인간 생존권을 보장하지는 않으면서도, 다른 나라의 인권에 간섭하는 자기당착을 저지른다고 비판하고는, 다음과 같은 통계를 제시한 적이 있다.

1990년의 경우 미국의 거리 걸식자(homeless)는 2백 50만이지만, 미국 인구의 4배에 달하는 중국은 15만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힐난한 것이다. 하물며 감옥에 들어 있는 죄수의 수까지 따지고 들면, 미국은 입이 열 개라도 아무 소리 못할 것이라 항변했다. 미국의 죄수 수는 인구 1만 명당 40명 꼴로, 중국의 4배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연구차 미국에 잠시 머물 때, 나는 부유층들이 몰려 사는 교외의 우아한 마을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 부근에 사는 어떤 한국 교민이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것이다. 그래서 점잖은 손님 노릇은 해야 할 것 같아, 선물꾸러미를 하나 고르려고 그 동네 큰 슈퍼마켓으로 갔다. 물건 하나를 골라 돈을 지불하고서는 줄지어 밖으로 나오는데, 내 앞에서는 어느 백인 여성이 걸어나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한 백인 남자가 쫓아오더니, 자기 부인이었던지 그 여성의 등을 감싸고는, 나를 험상궂은 눈길로 무섭게 흘낏흘낏 쏘아보며 매장 밖으로 줄달음쳐 나가는 게 아닌가. 작업복을 걸치고 있는 나를 ‘준비된 강간범’ 정도로 보았는지, 아니면 황인종 주제에 건방지게 이런 고상한 마을에 나타나서 깨끗한 물을 더럽히는 아니꼬운 놈이라 생각했을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아직도 나를 쏘아보던 그 혐오심에 불타는 듯한 그 백인 신사의 표독한 눈초리를 잊을 수 없다. 어쨌든 미국 흑인 2, 30대는 네 명 중 한 명 꼴이 늘 감옥에 갇혀 있다는 말도 들려올 정도다.

내우외환 가능성

하지만 미국 사회에서는 힘을 가진 세력은 사회적 평등에 무관심하고, 평등에 진지한 관심을 쏟고 있는 집단은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정의와 평등을 찾아 나서는 것은 언제나 약자”라는 경구를 우리들에게 던지지 않았던가.

어느 생태학자는, 미국 할렘 가의 유색인종이 겪는 극심한 소외감이, “그들이 살던 땅에 대한 정서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풀이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자신이 살던 땅에서 강제로 끌려와, 할렘 같은 곳에서, “자연과의 기능적 연계가 전혀 없는” 삶을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덧붙여 계급적이고 인종적인 억압까지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지독한 상실감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어쨌든 극심한 빈부 격차와 인종 갈등 등으로 인해, 미국 내 사회불안이 급증하는 현실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요인이 미국 사회의 존립 및 정체성 확립을 위협하는 가공할 시한폭탄처럼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넓게 퍼져 있다. 더군다나 현재 국제적인 빈부격차나 민족차별 등을 극복함으로써, 세계 평화 및 공생·공영을 이루고자 하는 범 인류적 열망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실정 아닌가.

그런데 미국 자본주의의 세계적 팽창과 침투에 대한 조직적인 국제적 저항이 이러한 미국 내의 사회불안 요소와 맞물린다면, 미국은 과연 어떻게 될까 … ? 이런 상황에서 미국 사회는 심각한 내우외환에 시달릴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머지않아 일종의 국가적 자구책으로서, 스스로를 지켜내려는 ‘미국 판 페레스트로이카’가 미국에 출현하지 않겠는가 하는,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보곤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전에 터졌던 ‘LA 폭동 사태’ 같은 것은 그 미미한 전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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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호성
· 서강대 사회과학대 학장 겸 공공정책대학원 원장(정외과 교수)
· 한겨레 신문 객원 논설위원
· 학술단체협의회 대표간사
· 미국 Berkely 대학 및 캐나다 뱅쿠버 대학(UBC) 객원교수
· 저서 :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우리 시대의 상식론>,
           <21세기 한국의 시대정신>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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