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 기형도

OKeverything 2009. 12. 21. 18:08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기형도
        가라, 어느덧 황혼이다 
        살아 있음도 살아 있지 않음도 이제는 용서할 때 
        구름이여, 지우다 만 어느 창백한 생애여 
        서럽지 않구나 어차피 우린 
        잠시 늦게 타다 푸시시 꺼질 
        몇 점 노을이었다 
        이제는 남은 햇빛 두어 폭마저 
        밤의 굵은 타래에 참혹히 감겨들고 
        곧 어둠 뒤편에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우리는 그리고 차가운 풀섶 위에 
        맑은 눈물 몇 잎을 뿌리면서 낙하하리라 
        그래도 바람은 불고 어둠 속에서 
        밤이슬 몇 알을 낚고 있는 흰 꽃들의 흔들림! 
        가라, 구름이여,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이제는 어둠 속에서 빈 몸으로 일어서야 할 때 
        그 후에 별이 지고 세상에 새벽이 뜨면 
        아아,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우리는 
        서로 등을 떠밀며 피어오르는 맑은 안개더미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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