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 마광수
ㅡ 출처 :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빈센트 반 고흐의 일생은 너무도 드라마틱하여 오히려 그의 그림들을 천박한 수준으로 떨어뜨려 버리는 일면이 있다. 전도사로 출발했다가 화가가 되고, 다시 정신분열 증세를 일으켜 자신의 귀를 자르고, 결국은 자살하고 만 그의 생애는 그의 그림에 나타나 있는 멋들어진 광기 못지않게 매력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중섭이나 이상, 윤동주, 또는 에드가 알런 포와 비슷하게 고흐를 바라보게 되고, 역시 '예술가다운 일생'이라고 감탄하게 되며, 그의 그림을 감상할 때 그의 드라마틱한 생애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없더라도, 아니 그가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그의 생애는 매력적이고 멋이 있으며 위대하다. 또한 그의 생애가 그토록 드라마틱한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의 그림은 멋지고 위대하다. 나는 예술가에게 무슨 특별한 광기나 요절을 기대하는 일반인들의 심리가 얄밉다. 또 거꾸로, 예술을 하지 않는 사람이 광적인 생활이나 무분별한 생활을 할 때 그러한 생활 태도를 매도해 버리는 사람들의 편견이 얄밉다.
예술가이든 예술가가 아닌 일반인이든, 누구나 각자의 광기를 가지고 살아간다. 어떤 이는 윤리나 도덕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어떤 이는 학문에 집착하며 어떤 이는 돈에 집착하기도 한다. 특별히 예술에 집착한다고 해서 그가 더 위대한 광기를 가졌다고 할 수는 없다. 또 예술가의 비상식적인 사생활이 오직 예술가라는 이유 때문에 감탄과 숭모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나는 빈센트 반 고흐가 예술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의 생애를 좋아했을 것이다.
그는 어떤 형태로든 무언가에 몰두해야 했다. 종교에 몰두하기도 하고 여자에게 몰두하기도 하고 고갱과의 우정에 몰두하기도 하고 또 미술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이 '몰두'는 그의 폭발할 것 같은 본능 때문이었다. 성욕인지 공격욕인지 아니면 명예욕인지 알 순 없으나, 그는 지긋지긋하리만치 '본능적인 배설욕구'에 시달렸다. 그러한 욕구를 그는 굳이 은폐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친 듯이 여기저기에 욕구를 배설해 냈다. 그 배설물들 중의 하나가 그의 그림일 뿐이다. 그는 그냥 그 똥을 마구 싸갈겼을 뿐이다.
그는 이 똥을 어디에 쓸까, 비료로 쓸까, 아니면 개에게 줄까 하고 치사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무엇을 남기겠다는 욕심없이 그는 그저 본능적 배설에만 몰두했다. 그의 자살만 해도 그렇다. 그가 예술가적 고뇌 때문에, 비관적인 인생 철학 때문에 자살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는 그냥 죽고 싶어 죽었다. 스스로의 본능을 더 이상 처리할 길이 없어 죽었다. 더 사랑할 상대가 없고, 더 그림 그릴 대상이 없고, 더 살아 봐야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죽었다.
예술가가 자살을 하면 멋있고, 승려가 분신 자살을 하면 소신공양이고, 혁명가가 자살을 하면 열사가 된다. 이건 참 우습다. 자살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개의 죽음이나 소의 죽음이나 파리의 죽음이나 인간의 죽음이나 다 같은 거지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생활고에 의한 자살은 비겁한 것이고, 치정 사건에 의한 자살은 병신 짓이고, 예술가의 자살은 근사한 것이라는 편견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또 자살이나 자연사나 병사나 무엇이 다른가? 죽는다는 것은 다 같은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자살은 그저 평범한 죽음이다. 그러나 그의 자살은 돌발적인 것이어서 좀 멋지다. 유서도 없이 무슨 선언도 없이 그냥 죽어서 멋지다. 자신의 자살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려고, 기록을 남기고 작품을 남기고 죽는 사람은 병신이다. 그는 그리고 싶어서 그렸고, 또 죽고 싶어서 죽었다. 그의 일생은 범인의 눈에는 불행한 것으로 보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마음대로 배설할 수 있는,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던 행복한 사나이였다. 그는 틀림없이 천당에 갔을 것이다. 예수의 말대로 그는 어린아이와 같았으므로. 어린아이들처럼 아무데서나 쉬 하고 오줌을 눌 수 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