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人+間] 40. 아코디언 연주자 `앙코르 인생` 송용창
43년 동안 밤 무대의 밴드를 했던 송용창. 클래식 무대에 도전했는데 뜻밖에 인기가 대단하다. 그는 '앙코르'를 받아 인생을 다시 산다 해도 '딴따라'가 되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정종회 기자 jjh@
빙글빙글 돌아가는 사이키 조명. 그 아래 부나방처럼 모여든 청춘남녀. 나이트클럽은 젊은이들의 해방구였다. 나이트의 꽃은 밴드다. 부산에서 밴드 생활을 가장 오래 한 연주가는 송용창(72) 씨. 1960년부터 2000년까지 나이트에서 스텝 좀 밟았다는 사람은 모두 그의 키보드에 몸을 맡긴 적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지금 그는 한쪽의 청력을 잃었다. 나머지 하나의 기능도 반만 남았다. 뼛속까지 전달되는 소음의 결과다. 그런 그가 요즘 클래식 무대에 자주 얼굴을 내민다. 나이트의 '딴따라'가 말년에 클래식 무대의 스타가 됐다.
"지금의 온천장 식물원 앞 어느 절에서 자랐다. 어린 소년은 쓸쓸함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친구라고는 하모니카. 그리고 좀 논다는 애들과 어울려도 보았다. 음악이라곤 콩나물 대가리도 배운 적이 없었다"
절에서 자란 소년 아코디언으로 외로움 달래
가방끈 짧아 음악이라곤 배운 적 없었지만
스무 살 우연히 딴따라 길 그리고 피나는 연습
40여 년 밴드하며 음악에 미쳐 산 '풍각쟁이 인생'
전국 돌아다니며 세상공부 참 많이 했죠
1940년. 일제의 대륙 침략이 기승을 부리던 때였지. 중국에서 철도기술자로 일하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2년 후 돌아가셨어. 엄마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 갔다가 광복 되던 해에 부산으로 돌아왔지. 광복 이듬해 구포국민학교에 입학했어. 집은 구포였지만, 지금의 동래구 온천동 식물원 앞에서 암자를 운영하던 할머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지. 엄마가 재혼을 하고 나서는 아예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며 금정국민학교를 졸업했어.
난 절에서 혼자였어. 늘 혼자였으니 시간이 많았고, 시간이 많았으니 이런저런 공상과 백일몽에 빠졌던 거야. 그러다가 심심하면 하모니카를 불었어. 고등학생 땐 건달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동래중학교에 다닐 적으로 기억되는데, 이웃집에 두 해 선배 유호석이라고 살았어.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됐고 후에 부산시향 지휘를 맡기도 했었어. 그가 애지중지하던 바이올린을 만지며 느꼈던 감촉이 아직도 기억돼. 아마 내가 음악과 인연이 맺어진 것은 그때가 아닌가 싶기도 해. 하지만 동래중 악대부 녀석들을 보고는 '사내자식들이 띵나발을 부네'하고 욕했으니 음악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고 봐야 할 것 같아.
그때 내 꿈은 화가였어. 그림은 혼자서도 깨칠 수 있잖아. 나는 절 언덕에서 온천장을 내려다 보며 그림을 그리다 몽상에 빠지곤 했지. 그러다 고등학교 때 결핵에 걸렸어. 아버지가 중국에서 그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아마, 집안 내림인 거 같아. 학교를 휴학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어. 감수성은 또래들보다 더 날카로웠겠지. 그렇게 빈둥거리던 어느 날, 아코디언 소리가 내 귀에 들어온 거야.
우리 동네에 시계방을 하는 남자가 있었어. 그 사람은 일본에서 귀국했는데 아코디언을 가지고 있었지. 한 번 생각해봐.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엄마는 재혼을 하고, 결핵에 걸려 학교마저 휴학한 채 절에서 외롭게 사는 소년을. 아코디언 음률을 듣는 순간 나는 뿅 가버린 거야. 아코디언 음률이 내 가슴을 쏙 후벼 판 거야. 음악은 아는 만큼 들린다고 하지. 아니야. 음악은 느끼는 만큼 들리는 거야. 나는 재혼한 어머니를 졸라 그 아코디언을 사고야 말았어. 일제 야마하였는데 쌀 몇 가마치 돈을 들였어.
아코디언이란 악기는 기가 막히게도 하모니카와 같은 구조잖아. 아코디언과 하모니카는 작은 오케스트라라고 불리는 점도 일치하고. 나는 혼자 하모니카를 불듯이 아코디언을 연주하기 시작했어. 하지만 말이 독학이지, 그게 가능하겠어? 콩나물 대가리도 모르는 주제에.
그게 아마도 1959년이지 싶어. 고3 시절이었어. 지금의 온천장 동방호텔이 옛날엔 국제호텔이었어. 이 호텔 국제회관나이트클럽 밴드의 리더인 임원식 씨가 우연히 우리 집을 지나친 거야. 아코디언 소리가 담 밖으로 흘러나온 게지. 기타조차 귀하던 시절에, 외제 아코디언은 더욱 귀했었지. 호리호리한 소년이 아코디언을 곧잘 연주하니 '이거다' 싶었던가 봐. 그는 그 바닥에서 유명한 밴드 마스터였어.
그런데 왠걸. 데려와 연주를 시켜 보니 콩나물 대가리도 모르는 거야. '베사메무초'를 연주하는데 박자도 지 맘대로야, 하하. 내 음악은 외로움을 달래려고 하는 즉흥적인 몸짓이었던 거야. 정규적인 음악 교육을 받고 연주한 게 아니었잖아. 그런데도 그 양반은 나에게서 가능성을 본 거 같아. '베사메무초'를 연습시켜 하루 무대에 세우더니 그가 말했어. 이왕 대학을 못 갈 것 같은데 자신의 밑에서 음악을 배워 보지 않겠느냐고. 나는 그 자리에서 승낙했지. 이렇게 해서 절집의 그림쟁이 소년이 화려한 나이트의 풍각쟁이가 된 거야.

아마 음악 전공자가 넘쳐나는 지금이면 불가능한 일이겠지. 외국에서 공부한 음악천재들도 한국에 돌아와 실업자가 되는 세상이잖아. 하지만 그때는 그랬어. 아코디언 자체가 한국에서 몇 대 없었고, 연주자도 흔하지 않았거든. 밤무대라는 게 그렇잖아. 흥을 돋우면 되는 거 아니겠어.
나이트클럽이 문을 여는 시간은 오후 일곱 시. 하지만 나는 오전 여덟 시에 출근해 낮 시간 내내 오르간과 씨름했어. 밴드 연주를 위해 아코디언은 버리고 오르간을 택했지. 하루종일 연습을 마친 뒤 저녁 일곱 시부터 새벽 두 시까지 영업을 하고 나면 잠잘 시간조차 없었던 거야. 한 육개월간 피나게 연습했더니 자신이 생기더라고.
그런데 참 이상하지. 해도 해도 피곤한 줄을 몰라. 아마 음악에 미친 게지. 화려한 밤, 정열적인 음악, 넘치는 여자들,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딴따라로 거듭 태어나게 만든 거야. 고3 졸업 즈음이었을 거야. 친구들이 대학을 가는 그때 나는 선생님의 세 배나 되는 월급을 받았어.
"스물세 살. 밴드 리더가 됐다. 열 살 많은 단원들을 이끌려면 실력이 있어야 했다.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스물다섯에 밴드 마스터가 돼 동양TV에 고정 출연했다. 장소팔 고춘자 이은관과 함께 유랑극단도 따라다니며 인생을 배웠다. 화려한 나날이었다"
밴드는 1년 단위로 계약하고 한자리에 2년 이상을 머무르지 않아. 손님이 바뀌듯, 밴드도 바뀌지.
동래관(동래카바레)에서 일하던 우리 밴드는 부산 MBC라디오방송국에 고정 출연하게 됐어. 보컬 없이 피아노 드럼 베이스 바이올린 색소폰 기타가 주멤버였어.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나이트와 캬바레가 된서리를 맞았어.
서울 스카라극장 주변에 전국의 밴드들이 몰려들었지. 저마다 무리를 지어 유랑극단이 되어 전국을 돌아다닌 거야. 어느 날 서울에서 생활하던 나는 악기를 도둑 맞고 말았어. 그러던 중 유랑 악극단을 이끌던 장소팔을 만났어. 고춘자 이은관과 함께 육개월간 전국의 뻐꾹새 우는 산골마을 순회를 한 거지. 거기서 코미디언 이주일도 만났고. 음악공부보다 인생공부를 더 했더랬지.
스물다섯에 부산동양TV 전속 밴드로 2년 가까이 출연했고. 그때 내가 밴드의 마스터였지. 열 살이나 많은 형들을 이끌려면 실력이 뛰어나야겠다 싶어 연습도 남보다 훨씬 많이 했지. 스물아홉에 처음 밴드를 결성했어. 나 자신이 에이전트가 됐으니까 단원들 생계를 책임져야 하잖아. 아마 밴드 이름이 송용창과 연주단이었던가. 자주 밴드를 결성하고 또 흩어지고 하니까, 이름도 가물가물해. 지금 부산 중부경찰서 맞은편의 소방서 건물 옆에 있는 건물인데 당시엔 전국 최고 나이트클럽인 동양제일관광회관이었어. 그곳에서 우리 밴드가 활동했지.
교수 연주보다 내 연주에
사람들이 더 열광하는 이유
심금을 울리는 악기
아코디언 때문이지
평생 나이트 소음에 노출
한쪽 귀 완전히 멀었지만…
화려한 불빛 아래
부나방처럼 살았지만…
내 인생 후회하지 않아
앙코르 소리 들으면 힘이 나
다시 태어나도 음악할 거야
그동안 결혼도 했지만 서른 다섯에 이혼을 하고 말았어. 생각해봐. 화려한 밤생활을 하는 사람이 가정에 얽매일 수 없었던 것 같아. 당시에는 밴드의 인기가 높았어. 돈도 제법 만졌고. 나이트클럽에서 발길에 채는 게 여자 아냐. 그러니 가정에 충실하기 쉽지 않았겠지. 서른일곱에 다시 결혼했는데 얼마 못 가 또 이혼하고 말았지. 애는 빽빽 울고, 그게 창살 없는 감옥이지. 스물에 이 바닥에 발을 들여놓고 15년간 부나비처럼 음악을 따라 흘러다녔는데 평범한 가장 노릇하기란 지금 생각해 봐도 무리였어. 그때만 해도 내가 잘나갔다니까. 그렇게 젊음이 영원할 줄 알았어.
영도구 태종대 곤포의 집 오픈 당시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연주를 시작할 시간이면 해가 서산으로 기울었지. 우리 밴드가 잔잔한 재즈 음악을 연주하면 석양이 손님들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거야. 그때 어떤 여성 한 명의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것을 보았지. 그 장면이 아직 선명해. 분위기가 좋았어. 꼭 분위기 때문에 울었겠어. 바로 음악이야. 나는 말야, 사람들 가슴속에 비집고 들어가 자극하고 휘젓는데 능숙했거든. 액션과 악센트가 강한 연주를 많이 하지. 정통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욕할지 몰라도 나는 밤무대 딴따라잖아. 강렬한 느낌을 이끌어 내는 게 내 음악이고 내 임무거든.
"쉰다섯에 온천장 카네기나이트로 갔다. 밴드 음악이 이미 사양길을 걷는 시절이었다. 밴드 대신 전자음악으로 바뀌었다. 쉰다섯에 들어가 예순두 살에 그만뒀다. 밴드생활이 끝난 것이다. 스물부터 시작해 예순두 살까지 장장 43년간 무대에 올랐으니 최장수라 할 만했다"
쉰다섯, 밤무대 밴드로 활동하기에는 늦은 나이에 다시 온천장으로 돌아왔어. 90년대 초반이었으니, 옛날의 휘황찬란함은 가신 뒤였지. 밴드가 점차 사라지고 전자음악으로 바뀌었어. 팔인조 밴드가 졸지에 사인조 밴드로 바뀌고, 일년 단위로 옮겨 다니던 것이 이년, 삼년 해를 넘겨 한자리에 눌러앉게 된 거야. 내가 떠난 뒤 딱 십년이 지난 최근에 카네기나이트도 아예 문을 닫게 됐더군.
환갑을 넘긴 영감이 되어서야 나는 밤 시간을 갖게 되었어. 참 자유롭다고 생각했어. 이리저리 여행도 하고. 그런데 말이야, 그게 하루이틀 일이지 맨날 놀려고 하니 좀이 쑤시는 거야. 삼 개월가량 놀았더니 도저히 못 참겠더군. 손가락이 간지러워 죽겠는 거야.
그때 내 눈에 또 아코디언이 들어온 거야. 돈을 한창 벌던 스물일곱에 산 아주 고가의 악기였는데 녹슬고 고물인 상태였지.
다시 악기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건, 아마 가족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몰라. 서울에 서른여섯 살의 딸과 재혼해서 낳은 스물일곱 살의 아들이 있긴 하지만, 가족다운 가족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 지금와서 후회해 본들 무엇하나. 후회는 많이 했지만 이미 지난 일이거든.
당시로서는 가정을 내팽개칠 수밖에 없는 사정도 있었어. 남들처럼 배운 거 없고 이 바닥을 돌아다니며 사회생활을 배운 터라 절제가 없었던 거야. 스무 살부터 인기를 먹고 살다 보니 교만해졌고 건방을 떨었어. 마음만 먹으면 웬만한 것을 얻을 수 있었으니 콧대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어딜 가나 송용창 잘한다, 잘한다 소리를 들었는데, 그게 음악을 잘한다는 것이지 인생을 잘 산다는 칭찬은 아니잖아.
"아코디언은 1인 오케스트라다. 소년은 어릴 적 절에서 혼자 아코디언을 연주했다. 소년은 예순셋이 되어 다시 혼자가 되니까 아코디언이 마음에 들어왔다"
아코디언을 잡았는데 왼손 연주가 너무 서툴러 애를 먹었어. 아코디언은 왼손으로 바람을 불어 움직이며 베이스를 넣어줘야 하는데 쉽지 않더군. 오른손은 대학생인데 왼손은 초등학생 수준인 게지. 밸런스가 안 맞으니 연주가 안돼.
아마, 2003년이었을 거야. 지인들과 경남 양산 법기마을의 한 촌집 마당에서 조그만 음악회를 가졌어. 근데 그날 인기가 장난 아니었어. 아직 왼손이 서툴러 연주에 자신이 없었거든. 그런데도 사람들은 난리였어. 앙코르를 외치는데 뭐, 준비한 레퍼토리가 적어 앙코르곡을 연주할 수 없을 형편이었거든. 그날 자신감을 얻고 본격적으로 아코디언 연주를 시작했지.
그날 사람들이 왜 열광했던가 곰곰 생각해 보았어. 첫 번째는 아코디언이라는 악기의 묘한 매력 때문이가 싶어. 오케스트라와 같은 웅장한 소리가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에 딱 좋은 악기거든. 다음으로는 관객의 가슴 깊이 찌르는 나만의 과장된 연주주법 영향이 아닌가 싶어.
엘리트 음악교육을 받은 정통 연주가들이 나를 보면 웃겠지. 그런데도 내가 클래식 교수들보다 박수를 더 많이 받는 이유가 뭐겠어. 바로 엄격함이 없다는 것, 음악적 기교를 연주하는 게 아니라 가슴에 내재된 슬픔이나 기쁨을 자연스럽게 연주한다는 것 아닐까. 가끔 백화점이나 클래식 연주무대에 초대될 경우 내 순서는 늘 마지막이야. 왜냐고. 일찍 시작해버리면 뒤에 오르는 연주가들이 맥이 빠져 버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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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창에게 아코디언을 배우는 제자들은 20여 명. '악기든 운동이든 늙기 전에 소일거리 하나는 꼭 준비하라.' 송 씨는 이 말을 기사에 꼭 실어달라고 주문했다. |
음악은 듣기 좋아야 해. 교수들 백날 연주해 봤자 앙코르 안 나와. 앙코르 소리치는 젊은이들이 있어서 자세히 보면 제자들이지. 나이트의 음악은 말이야, 관객의 인기를 먹고 사는 음악이거든. 대중과 호흡하는 음악. '닥터 지바고'를 멋들어지게 연주하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오빠' '앙코르'가 쏟아져. 아코디언 제자들도 꽤 많아. 부산과 경주를 오가며 20여 명을 가르치고 있어. 아코디언에 늦바람이 난 사람들이지.
"김옥련의 발레 '분홍신 그 남자'. 이원국 김옥련이 발레를 연기한다. 피아노 바이올린 클래식기타 테너 소프라노 그리고 송용창의 아코디언이 연주한다. 아코디언 한 대는 나머지 열 대의 악기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평생 나이트 무대에서 사람들을 울고 웃게 했던 송용창. 일흔둘의 관록을 실어 집시음악과 차르다시, 블랙 아이즈를 연주한다. 앙코르가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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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련의 퓨전 발레 '분홍신 그 남자' 리허설 장면. 발레리노 이원국이 연기를 하는 사이 송용창이 연주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클래식 무대에서도 관객의 감정을 흔드는 밤무대식 음악을 한다. |
어저께도 공연 끝나고 젊은 여자 무용수가 '선생님 수고했어요'라며 어깨를 주물러 주더군. 남 보기에 화려해 보여. 하지만 집에 돌아와 보니 나를 반기는 건 아침에 먹다 남긴 식은 밥이더군. 외로움이 닥치는 거지. 그러나 어쩌겠나. 내가 젊어서 주변에 지은 죗값을 지금 받는 거지. 한평생 재미있게 살았잖아, 안 그래. 귀가 안 들리면 뭐 어때.
절에서 혼자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소년이 일흔이 넘어 혼자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어. 일장춘몽이었지. 지나간 젊음이 나이트에서 하룻밤 뛴 것처럼 허망해.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해.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더라도 음악을 할 거라고. 화려한 불빛 아래 부나방처럼 인생을 살 거라고. 후회하진 않아. 글=이상민 기자 yeyun@busan.com
사진=정종회 기자 jjh@
| 12면 | 입력시간: 2011-12-10 [16:12:00]